2010년 4월 26일 월요일

자연 - 환경과 자연

자연 - 환경과 자연

 

 

자연 (自然 nature)

천연 그대로, 인위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사물·성질·현상.

 

 

 

설명
천연 그대로, 인위에 의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사물·성질·현상. 본래 자연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유래하였는데, 《노자(老子)》에서 <스스로 그냥 있음>이라는 의미로 쓰였다. 영어에서 <자연(nature)>의 기원은 <태어나다(nascor)>에서 나온 <natura>였다. 그리스에서는 <태어나다, 생기다(physis)>를 사용하였다. 이 말은 원래 스스로 생기는 것을 의미하며, 인공적인 규칙이나 습관인 <nomos>의 반대개념이었다. 이처럼 자연이란 산·강·바다·초목·동물·비·바람처럼 저절로 생성·전개·소멸이 이루어지는 일체의 것을 의미한다. 넓은 의미로는 조화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 일체의 것, 곧 인간을 포함한 천지간(天地間)의 만물·우주까지도 포괄한다.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견해는 시대나 상황, 학자에 따라 다른 이론이 제시되었고, 그 자연관에 의해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視角)도 많이 달라져 왔다.

 

동양
중국의 노자로부터 출발한 동양에서의 자연관은 무위(無爲)와 연결되어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말로도 표현되었다. 이때의 자연이란, 자기에 대해서도 만물에 대해서도 <인위를 가하지 않은 스스로 그냥 있음>을 의미하며, 오늘날의 자연이 뜻하듯이 삼라만상의 대상적인 세계의 일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파악된 것은 아니었다. 한편, 4세기에 《장자(莊子)》를 주석한 곽상(郭象)은, 자연(自然)과 타연(他然)을 구분하여, 도(道)는 자연이며 타연이 될 수 없음을 말한 바 있다. 여기에서 타연은 절대타자(絶對他者)에 의해 우주가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이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의 주요골자는, 인간이 언어를 통한 <의미차원(意味次元)>을 소유한다면, 도(道)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존재차원(存在次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자》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았으며 땅은 하늘을 본받았고 하늘은 도를 본받았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았다>고 하듯이, 도와 자연을 같은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스스로 그냥 있음(自然)>이라고 표현하였으며, <스스로 그냥 있음>은 언어로 규정될 수 있는 의미차원을 멀리 떠나 있는 진정한 도의 모습으로 보았다. 한편, 자연을 몸에 체득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현덕(玄德)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는데 노자는 이것을 <지극히 높은 덕은 인위적이 아니므로 덕이 덕(德) 같지 않다. 덕 같지 않은 덕이야말로 참다운 덕이다>라고 하고, 장자는 <모든 성인(聖人)들은 자연의 세계에 합일함으로써 극치를 이룬다>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크나큰 긍정의 세계에 의존하는 것으로, 고대 동양인의 자연관에서 보면 자연 가운데에 신적인 요소나 인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어서 신·인간·자연의 삼자가 내면적으로 결부되어 있었다.

 

서양
어원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서양의 자연관은, 인간이나 신을 자연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통일체로 파악하였다는 점에서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과 흡사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자연관에 <그 자체 안에 운동변화의 원리를 가진 것>이라는 자연순환의 원리를 첨가하였다. 그러나 중세 그리스도교세계에 들어서면 이러한 통일체는 파괴되고 신-인간-자연이라는 계층적 질서가 나타난다. 여기에는 신이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였으므로 이들로부터 초월적 위치에 있으며,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라는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러한 중세의 자연관은 자연을 인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대립자로서 객관화하고, 밖에서부터 여러 조작을 가해 양적으로 분석하여 <법칙>을 확립하고 이것을 파악, 이용하려 한 것이다. 여기에서 자연을 오로지 <크기> <형태> <운동> 등 요소로 분해해서 인과적·수학적으로 해석해가는 근대의 기계론적 자연관이 성립된다. 이것을 철저하게 수행한 사람은 R. 데카르트로서, 그는 물체로부터 <실체형상>이라는 생명원리를 제거하고 일정한 기하학적 <연장(延長)>으로 환원하였으며, 마음이나 영혼이라고 불리어 왔던 것은 <순수사유(純粹思惟)>로서 순화된다고 하였다. 이 철저한 이원론 아래에서 자연은 단순한 연장으로서 모든 심적(心的)·생명적인 것이 빠진 수학적 대상이 되었다. 한편, F. 베이컨이 <아는 것이 힘이다>라고 말한 실천적 지식관은 <자연을 지배하는 권리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정복적 자연관으로서 근대 서유럽자연관의 또하나의 특징을 이루었다. 17세기에 성립된 데카르트와 베이컨의 자연관은 18세기 계몽사상을 통해 그 배후에 있는 신학적 전제를 제거함으로써 세속화되고 더욱 당연시되는 경향이 강하였다.

 

한국
한국에서 자연은 순응하고 따라야 할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이것은 산이 많고 사계절이 분명한 환경 탓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계절과 자연에 순응하는 생활습관과 놀이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예술적 감각을 발전시켜 한국적인 미를 낳게 하였다. 즉, 멋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예술은 자연과 조화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생활 속의 자연으로, 고대로부터 내려온 자연숭배사상이 풍수지리설과 어울려 공간구성의 중심개념으로 발전하였다. 이 개념은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인간·자연·신과의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자 하였던 것으로, 조원(造苑)의 특색에서 잘 나타난다. 즉,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인간이 자연 속에 동화되는 자연주의 조원이 발달하게 되었다. 화려한 화포(花圃)를 즐기지 않고 담담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인간 심성을 순화하고 수신하는 공간을 조성하였다. 둘째는 미술로 표현된 자연으로, 동양인의 자연관이 유가와 노장사상의 영향이 컸듯이 미술도 그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즉, 인간은 자연과 하나라는 생각이 깊었고, 자연을 인간이 가야 할 곳이나 안식처로 생각하여 산수화가 발달하였다. 셋째로는 문학으로 표현되는 자연의 모습이다. 먼저 신화를 살펴보면, 우리의 건국신화에는 우주창조도 없고 초월신도 없다. 신화의 신은 모두 자연(天·日·山水) 안에 존재하는, <자연이 곧 신이다>를 원형으로 삼고 있다. 이렇게 표현되는 자연은 시대에 따라 그 감각을 달리한다. 향가로 대표되는 삼국시대의 자연은 상징이기가 일쑤이며 자연과 인간의 교감·등질(等質)의 감성체험을 바탕에 깔고 있다. 《청산별곡》으로 대표되는 고려시대에는 자연감정이 한결 뚜렷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친애의 감정이라기보다는 허무의 감정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조선시대 시조·가사에서는 자연예찬이 풍미하여 강호가도(江湖歌道)라는 문학사조를 이룰 만큼 자연이 매우 보편화되었다. 자연의 거짓이 없는 상태, 있는 그대로의 드러남을 보았을 때 사람은 비로소 자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이를 곧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라 하였다.

 

현대
오늘날의 자연은 서유럽의 자연관을 받아들여 자연인식이라는 점에서는 확실히 많은 성공을 거두었고, 인류의 물질적 조건을 크게 개선시켜 오늘날의 과학기술문명을 출현시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공해나 자연파괴와 같은 마이너스 요인을 낳았으며, 자연보호라는 반성적 측면도 나타났다. 현대는 자연관에 있어서 전환기라 할 수 있으며, 새로운 자연관은 근대의 기계론적 요소주의(要素主義)를 넘어 자연을 하나의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으로서 파악하고, 인간은 <자연과의 공생>이 가능하도록 애써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은 요소간의 긴밀한 상호작용을 갖는 전체로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환경의 변화 속에서 자율적으로 자기를 보존하는 것이어야 하며, 적당한 조건 아래에서 새로운 자기형성(自己形成)을 해야 하고, 이 시스템 속의 일원으로서 조화(調和)를 유지해야 한다. 이러한 자연관은 <스스로 그냥 있음>이라는 동양의 자연관과 연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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