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일 월요일

죽음 - 임종의 시기, 죽음/길학미눈물

죽음 - 임종의 시기, 죽음/길학미눈물

 

 

죽음 (death)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원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설명
생명활동이 정지되어 원상태로 돌이킬 수 없는 상태. 삶 또는 생명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의학·생물학·철학·종교·법률학·심리학 등 여러 관점에서 해석된다.

의학·생물학상의 죽음
의학적으로, 특히 임상적 죽음은 심장의 박동과 호흡이 영구적으로 멈추었다는 확증이 있을 때를 말한다. 사람의 죽음을 판정하는 데는 일반적으로 이 상태가 가장 모순이 적은 죽음의 정의라 할 수 있다. 최근 의학의 발달에 따라 뇌의 기능이 회복될 전망이 아주 없는 환자를 기계적으로 유지·관리할 수 있는 경우가 늘어나고, 이에 따라 <뇌사(腦死)>라는 새로운 죽음의 판정기준도 생겼다. 이것들은 개체사(個體死) 가운데 사람의 죽음에 대한 임상적 사고방식으로 다른 고등동물의 죽음에도 어느 정도 적용할 수 있으나 모든 생물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생물학에서의 죽음이란 생물이 생명을 불가역적(不可逆的)으로 잃은 상태이다. 일반적으로는 개체의 죽음을 의미하나 기관·조직·세포 등의 기준에서도 죽음이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개체가 살아 있다> <세포가 살아 있다> 등에 대한 생사의 기준은 각각의 기준에 따르게 되며,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존재가치에 대한 인정 여부 내지는 일정한 기능의 발휘 여부 등에 따른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세균이 분열·증식할 수 있으면 그 세균은 살아 있다고 인정되며, 살균제나 자외선의 조사(照射)로 번식능력을 잃으면 물질대사가 정지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 세균은 죽은 것이 된다. 고등동물에서는 번식 능력을 잃어도 신경기능이나 기타 장기활동이 정지되지 않으면 그 개체는 살아 있는 셈이 된다. 즉 생물은 종류에 따라 생사기준이 달라지고 생물학적 죽음이란 개체로부터 세포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준에 대한 가치 판단의 기준 또는 생명력을 규정하는 데 달려 있으므로, 이를 개념화하면 <생명의 불가역적 상실>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생물학의 진보에 따라 생명개념이 달라지면 생물학적 죽음에 대한 개념도 필연적으로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고등동물의 경우 뇌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고 심장이 뛰지 않으며 호흡운동이 멈추어 인공적으로 소생시키는 노력이 모두 무효가 되었을 때 <죽었다>고 판정된다. 이는 고등동물 개체에 기대되는 존재가치 즉 주로 개체의 전일성(全一性;integrity)을 불가역적으로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개의 세포·조직·기관은 배양하든지 다른 개체에 이식하면 살아날 수도 있다. 이들은 기관·조직·세포기준에서는 살아 있으나 개체를 살린 예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고등식물에서는 접붙인 작은 가지로부터 식물체가 생긴다). 히드라나 해면동물의 경우에는 개체를 만들고 있는 세포를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도 한 군데로 모인 세포 덩어리에서 새 개체가 생긴다. 이 실험에서는 원래의 개체는 확실히 없어졌으나 세포는 살아 남아 새 개체를 만들었으므로 이러한 동물에서는 세포의 생사가 중요하며, 세포가 살아 있으면 생물학적 가치는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즉 하등동물에서는 세포기준 생사와 개체기준 생사에 대한 구별이 고등동물처럼 명확하지 않다. 한편 짚신벌레나 클로렐라처럼 단세포로 이루어진 생물은 세포의 죽음이 개체의 죽음과 같다.

죽음에 대한 자각
의학이 발달하여 평균수명이 길어졌어도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의 죽음을 직접 체험할 수 없다. 다만 다른 사람이 죽는 현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죽음을 깊이 생각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죽음이 언제 올지 아무도 모른다. 이러한 뜻에서 죽음은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갖고 있으므로 죽음에 대해서 불안·공포·비애를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죽음은 단순한 의학이나 생물학적 문제로 그치지 않고 철학·종교 등의 문제로 시대·나라를 초월하여 중대한 의미를 갖는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주체적 의미부여
죽음은 삶의 부정(否定)이며 삶을 뒤집은 것이므로, 죽음에 대한 뜻을 묻는 것은 삶의 뜻을 묻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다는 것은 또한 죽음은 모든 순간에 올 수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 사람들은 살아 있는 뜻을 반성, 본래의 자신과 그 사는 목적을 주체적으로 다시 질문하여 삶과 죽음을 전체적·통일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삶과 죽음에 대한 사고방식은 항상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생사관>을 일체화시켜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사관의 4가지 유형
죽음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염원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문제를 시간적으로 해결하려는 사고방식이 생겼는데, 이를 다음과 같이 유형화할 수 있다.

① 현실의 육체적 생명이 무한하다고 믿는 형: 불로장수의 영약 선단(仙丹)를 먹으면 죽지 않는다는 중국의 신선설과 이집트에서 미라를 보존하는 사상 및 그리스도교에서 최후의 심판의 날에 무덤으로부터 소생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종말사상이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현대에도 호르몬제를 애용하면 젊어지며 값비싼 화장품으로 젊음과 미모가 보전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고, 약이나 주사가 있으면 죽지 않는다고 믿는 환자도 적지 않다.

② 육체는 사라져도 영혼은 남아 있다고 믿는 형: 불교의 서방 극락정토 및 그리스도교의 천국과 지옥 등 내세관이 이에 해당되며, 그에 따라 사자심판사상이 성립된다. 이와는 별도로 사람이 죽으면 여러 형태로 환생(幻生)하여 죽음을 대신한다는 재생과 윤회사상도 있다. 영혼이 존재한다면 죽음은 새로운 인생의 출발이 된다. 내세의 행복을 얻기 위해 현세에서 고생이 되더라도 덕을 쌓아야 한다든가, 현실의 지옥을 이상적 천국으로 개혁해야 한다든가 또는 천국은 마음 속에 간직해야 한다는 등 다양한 교리와 생활태도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③ 불멸의 대상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하려는 형: 명절이나 제사 때는 그동안 생활에 쫓기어 잊어버렸던 가문의 역사를 마음 속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먼 옛날의 선조로부터 면면히 이어진 무한한 연쇄 속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면 그 무한한 생명이 멸하지 않는 한 자신도 역시 죽지 않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즉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과 같이 과학·예술, 인류의 행복과 평화의 이상, 또는 일상 하는 일이나 사업 등 자기가 심혈을 기울이는 대상이 영원하다면 자신도 불멸한다고 믿는 사람, 사업에 골몰하는 사람, 극성스럽게 일하는 회사원 등은 모두 여기에 속한다.

④ 육체와 영혼 및 그 대용이 되는 것까지도 소멸되지만 현실에 충실함으로써 생사를 초월한 경지를 체득하는 형: 무아(無我)의 경지로 들어가거나 신과 합치되는 신비적 체험(神秘的體驗)을 예로 들 수 있다. 예도(藝道)·운동 등에 정진하여 자신과 현세까지도 잊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들어가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삶에 대한 집착을 포함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지나치며 일상생활을 새로이 뜻있게 살고자 한다.

죽음에 부여되는 의미의 변화
어떤 생사관을 가지고 있더라도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며, 산 사람은 죽은 사람과의 지난 인연을 생각하고 정중히 장례를 치르게 된다. 그 형식은 옛날과 같더라도 뜻은 달라지고 있다. 영혼의 활동을 제한한다는 뜻에서 시체를 돌로 눌러두는 풍습이 무덤 즉 묘의 기원이지만 현재 묘 앞에 세우는 비석은 죽은 사람에 대한 추억과 경모를 표시하는 뜻이 되고 있다. 현대인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공포보다 현실의 삶을 넉넉하고 즐겁게 충족시키는 편에 중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변화가 없지만 죽음의 의미는 앞으로도 계속 변화할 것이다.

 

여러 민족의 죽음에 대한 해석
어느 사회에서도 죽음은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으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 및 구체적으로 취급하는 방식은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르다. 종교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죽음에 대한 의미와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힌두교에서는 죽음이 윤회에 따라 일어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죽음의 기원은 자주 신화로 설명되고 있어서, 본래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금기(禁忌)를 범했다거나 신의 노여움을 사서 저주를 받는 등의 이유로 죽게 되었다고 한다. 셀레베스섬의 알푸루족은 신이 하늘에서 내려준 돌과 바나나 중에서 인간이 식품으로 바나나를 골랐기 때문에 생명이 정해지게 되었다고 믿는다. 멜라네시아와 아프리카에는 신령의 메시지가 잘못 전달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예를 들면 부시먼족의 경우 달이 토끼에게 <내가 죽어도 되살아나듯이 사람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명령하였는데, 토끼가 <사람은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잘못 전했기 때문에 생명이 정해졌다는 신화가 있다. 많은 미개사회에서는 개개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초자연적인 것으로 돌린다. 즉 아프리카의 체와족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조사할 당시 생긴 사망사건 149건 가운데 4건은 신이 한 일로(자연사), 140건은 요사스러운 술법 등 주술 탓으로, 5건은 조상이 원인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아프리카 누에르족은 벼락이나 돌풍으로 죽은 사람은 신이 하늘로 내려간 것으로 생각하며 이것은 혼령 특히 악령의 짓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은 영혼과 맺어진 일이라고 받아들인다. 멕시코의 마야족은 넋이 13갈래로 구성되어 그 가운데 하나나 전부가 떨어져 나가면 병들어 죽게 된다고 믿는다. 또 인간은 그 자신과 넋을 공유하는 동물이 있으므로 그 동물이 죽으면 사람도 죽는다고 생각한다. 그 밖에도 영혼이 달아나거나 영혼을 잃는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도 많다. 그러나 죽은 뒤의 영혼의 존재를 믿는 곳에서는 죽음은 오직 육체가 사라짐을 뜻할 뿐이고 넋은 이승이나 저승에서 영생한다고 생각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 사는 원주민은 죽은 뒤 영혼은 저승으로 들어가거나 나비가 되어 산다고 믿는다. 또한 육체적인 죽음과 사회적 죽음이 엇갈리는 경우도 있다. 누에르족은 행방불명된 사람에 대한 장사를 치른 뒤에 본인이 돌아오는 경우, 장례를 치르는 동시에 그의 영혼은 희생된 소와 함께 저승으로 들어갔고 그와 살아 있는 사람들과는 인연이 끊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는 육체적으로 살아 있어도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이 되어 친족들에게 친족대접을 받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죽음이라는 자연현상을 문화적·사회적으로 다룸으로써 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 대처하게 된다.

장법(葬法) 및 장례
장법에는 매장·화장·수장·임장(林葬)·조장(鳥葬)·동굴장·미라 등이 있다. 수장처럼 유체(遺體) 전부를 영원히 이 세상과 단절시키려는 방식과 미라처럼 유체를 본래의 모습으로 보존하고 숭배하려는 양극단적 방식이 있는가 하면, 시체를 불에 태우거나 썩히거나 또는 동물이 먹게 한 뒤에 뼈를 주워모아 제사를 지내는 방식과 단번에 처리하여 끝내는 방식이 있다. 다시 크게 나누면 유체나 유골을 보존하는 방식과 영혼만을 숭배하는 방식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죽은 이에 대한 의례는 시체를 안장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영혼에 대한 위로도 포함되며 여기에는 죽은 이에 대한 애도와 망각이 섞여져 있다. 장례는 죽은 이를 위하는 동시에 유족을 위하는 일도 된다. 사람이 죽은 엄숙한 자리에 서게 되면 고인을 생각하며 스스로의 운명도 헤아리게 되며 일종의 종교적 감개에 잠기게 되고 순수한 마음을 갖는 기회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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