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8일 수요일

시리아 - 서아시아 국가 시리아

시리아 - 서아시아 국가 시리아

 

 

시리아 (Syrian Arab Republic)

아시아에 있는 나라. .
설명
아시아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시리아아랍공화국(Al-Jumhūrīya al-'Arabīya as-Sūrīya). 면적 18만 5180㎢. 인구 1758만 5540명(2003). 북쪽은 터키, 동쪽에서 남쪽으로 걸쳐 이라크·요르단·이스라엘, 서쪽은 지중해와 레바논에 접한다.

시리아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동부지중해 연안 북부를 가리키는 명칭이며 그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의 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과 터키의 일부에 걸쳐 있었다. 이러한 나라들은 지리적·역사적으로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어 시리아에는 이 지역의 나라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연방국가를 만들겠다는 <대시리아 구상>이 있다. 수도는 다마스쿠스.

시리아의 자연
국토의 대부분이 동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어지며 아라비아반도까지 이어지는 해발고도 200~1000m의 고원대지가 자리잡고 있다. 동부지방은 대부분이 사막이며 수목 없는 대초원으로 구성된 건조한 고원이다. 터키에서 발원하는 서아시아 최대의 유프라테스강이 북동부를 가로지르며 이라크 메소포타미아평원으로 흐른다.

남부 일대는 광대한 시리아사막을 이루고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팔미라 쪽으로 3줄기의 낮은 산맥이 뻗어 있으며 유프라테스강 쪽으로 이어져 있다. 남단부에는 드루스산(1801m)이 있다. 지중해에 이르는 서부와 레바논 국경 산악지대 남서부는 지형적·기후적으로도 동부 시리아대지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해발고도 1000m급 안사리야산맥이 지중해 연안과 나란히 뻗으며 연안에 좁고 긴 해안평야를 만들고 내륙부는 오론테스강으로 관개되는 비옥한 계곡지대를 만들어 시리아 최대의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남서부에는 레바논과 국경을 이루는 해발고도 2000~2500m급 안티레바논산맥이 있으며 그 동쪽 기슭을 흐르는 바라다강 연변에 있는 수도 다마스쿠스는 전형적인 오아시스도시이다. 안티레바논산맥 남부에 있는 독립봉 헤르몬산(2814m)은 시리아의 최고봉이며 그 남쪽이 이스라엘과의 국경 골란고원이다.

기후는 서부가 지중해성 기후이며 동부는 내륙성 사막기후이다. 해안 평야지대와 서부 산지는 여름은 덥고 겨울에는 온난한 습윤기후이다. 연강수량도 760~1270㎜로 풍부하여 산맥에는 삼림이 무성하다.

내륙은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매우 덥고 겨울은 춥다. 11~3월이 우기인데 비가 오기도 하고 눈도 날리며 일교차도 심하다. 연강수량은 알레포에서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지대는 600㎜, 내륙지대는 300㎜, 남동부 사막지대는 150㎜ 이하이다.

시리아의 역사
시리아는 북쪽 터키고원과 남쪽 아라비아반도의 접촉지대이고 지중해에 면해 있어 동 서간 교통요충인 서아시아의 십자로이다. 그러므로 여러 민족이 이 땅에 와서 다채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시리아의 역사는 BC 3000년 무렵 셈족계 아모리인·가나안인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구축했으며 알파벳을 발명했고 지중해를 무대로 국제무역에 종사했으나 BC 16세기에 이집트와 히타이트에 정복당했다.

BC 11~BC 10세기에 동쪽에서 셈족계 아랍인과 헤브라이인이 들어와서 왕국을 만들었으나 BC 8세기 중엽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멸망한 뒤 신 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 알 렉산드로스대왕 등 지배자가 어지럽게 바뀌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BC 300년에 부장(部將) 셀레우코스가 시리아 북부 오론테스강 하류 지역에 안티오키아를 세우고 이곳을 도읍으로 하는 셀레우코스왕조 시리아왕국을 세웠다. 전성기에는 인도 서쪽의 서아시아 전역에 걸쳐 군림하여 아시아에 대한 헬레니즘문화 보급에 이바지했으나 BC 63년부터 로마제국, 4세기 무렵부터 비잔틴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7세기 무렵 이슬람교를 받드는 아랍인이 서아시아 일대를 제압하여 이슬람제국을 세웠다. 다마스쿠스는 우마이야왕조시대에 수도가 되었으며, 아바스왕조시대에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긴 뒤에도 상업문화도시로서 번영했다. 13세기 무렵부터 서쪽에서 십자군, 동쪽으로부터 몽골군의 침략을 받았다.

16세기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 되어 약 400년에 걸친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말 아랍독립운동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과 협력하여 터키세력을 몰아냈으나 전쟁 뒤 프랑스군이 진주(進駐)하여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이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이 있었지만 프랑스 통치는 제2차세계대전 뒤까지 이어졌으며 1946년 4월에 독립을 달성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시리아의 정치
독립 뒤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여 요인 암살·쿠데타가 자주 일어났다. 1955년 바그다드조약에 따른 공산주의 봉쇄나 1956년의 수에즈전쟁 등 국제정세가 시리아를 친이집트 반서방노선으로 바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아랍부홍사회당(바스당)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1958년에 이집트와 합병하여 아랍연합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합병 뒤의 운영은 원활하지 못했으며 1961년 쿠데타로 아랍연합에서 탈퇴하여 다시 단독 공화국이 되었다. 1963년 바스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재연합을 이루지 못했고, 그 뒤에도 쿠데타와 바스당 내 분열항쟁이 꼬리를 이었으며, 1967년 제3차중동전쟁에서 남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 빼앗기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1970년 쿠데타로 아사드 현정권이 들어서 오랜 세월에 걸친 내분에 종지부를 찍었다. 1973년에 항구헌법이 제정되었고 소련의 원조로 유프라테스댐 제1기공사를 완성하는 등 경제정책도 순조로웠으며 내정적으로 안정되고 대외적으로도 그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1973년 이스라엘과 제4차중동전쟁에 들어갔고 1975년 레바논내전에도 개입하는 등 인접한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이들 전쟁에 대한 화평교섭이나 수습공작을 둘러싸고 여러 나라와 새로운 대립·화합이 생겼다.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캠프데이비드협정 뒤에 이집트가 아랍전선에서 이탈한 데 대항하였고, 아랍진영 강경파로서 반이집트의 선두에 서서 친소경향을 강화했다. 시리아 현대사에서 최장기 집권(30년)을 기록한 아사드정권은 이슬람교 소수파인 알라위파가 차지하여 1979년부터 이에 대항하는 다수파인 수니파의 반항이 무슬림동포단의 테러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에 대해 철저한 탄압과 대규모 괴멸작전에 나섰다. 1980년 가을까지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뒤에도 산발적인 폭탄사건이나 폭동이 일어났다. 외교면에서도 이집트-이스라엘평화조약, 이란-이라크전쟁에 기인하는 아랍진영의 분열은 시리아에 고립이라는 큰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정체(政體)는 헌법에서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국가라 규정하여 사회주의경제에 의한 국가건설을 지향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나, 헌법에서 대통령은 이슬람교도로 규정하고 있다. 원수는 1971년 이래 하피즈 알 아사드 대통령(2000년 6월 아사드 대통령 사망, 그의 아들이 대통령직 승계)이고 의회는 단원제 인민의회(정수 250)이다.

정당은 1972년 이래 바스당을 중심으로 4당이 결집한 민족진보전선이 있으나 사실상 바스당의 일당지배에 놓여 있다. 외교는 아랍민족주의·반제국주의·비동맹외교가 외교의 3대 지주이다. 아랍권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강경파였으나 구소련의 붕괴와 걸프전쟁 등으로 인해 유연한 태도로 돌아섰다. 2002년 미국의 중동정책에 실망하여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국방비는 10억 달러(2002)이고 30개월의 병역의무가 있다. 육군 21만 5000명, 해군 6000명, 공군 4만 명이다(2002).

시리아의 경제·산업
1963년 이래 사회주의체제를 채용하여 농지개혁·기업국유화 등 제도개편이 계속되어 경제성장은 두드러지게 둔화하였다. 그러나 1970년 아사드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온건한 현실노선으로 수정하여 외국자본의 유입, 각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 증대에 노력하고 있다.

근래 석유를 중심으로 하는 광공업으로 비중을 옮기고 있으나 농업은 여전히 기간산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강수량도 많으며 국토의 65%가 경작 가능하지만 실제 경작지는 그 반 정도인 551만㏊이며, 관개지는 그 10%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리아 농업은 기후 특히 천연의 강수량에 크게 좌우되는 약점이 있었으나 유프라테스댐이 완성되어 64만㏊의 관개지와 80만㎾의 전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주요농산물은 밀·보리·면화·콩·사탕무 등이다. 지중해 연안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올리브·포도·토마토·수박·멜론 등 과일과 야채류 재배가 성하다. 목축도 양·염소를 중심으로 내륙고원 일대에서 사육되며 양모·양피·치즈·닭고기 등 축산물이 농업생산의 35%를 차지한다.

시리아의 석유는 1959년 북동쪽 티그리스강 연변에서 발견되어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산유량은 해마다 증가하여 2001년에 연간생산량 18억 8000만 배럴을 넘었다. 현재 자원보호를 위해 14억 3100만 배럴로 유지하고 있다. 산유량이 많지는 않으나 다른 중동산유국이 페르시아만에 집중되어 있는 데 반해 지중해에 접해 있는 유일한 산유국으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는 가맹하고 있지 않았으나 1972년 이래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에는 가맹하고 있다.

석유 이외에는 인광석이 채굴되어 수출되고 있다. 공업에 대한 투자도 적극적이며 식품·담배·직물·시멘트 등 공업생산이 급증하고 있다. 석유정제부문은 홈스제유소(연간 8억 2680만 배럴)에 이어 1978년에 바니야제유소(연간 9억 5400만 배럴)가 완성되어 석유제품의 국내수요를 충당하고 있다.

경제개발은 1961년부터 시작되었다. 공업개발에 중점을 두었던 제4차계획 달성률이 50% 이하로 끝난 데 대한 반성과 인구 급증으로 식량자급률이 떨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제5차계획(1981~1985)에서는 농업부문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무역의 기본구조는 근래 그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석유·석유제품 외에 면화·섬유제품·농산물 등을 수출하고 공업제품과 소비재를 수입하는 형태이다. 산유국이기는 하나 수출량이 적어 무역적자를 벗어나지 못하여 페르시아만 여러 나라로 나가 벌어들이는 한편 아랍산유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와 이라크의 송유관 통과료 등으로 적자를 메워 왔다.

그러나 레바논내전에 대한 장기적 개입으로 인한 군사비의 증대, 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의 삭감, 송유관 통과료 수입의 두절 등으로 제5차계획도 어려움을 겪었다.

철도는 오스만제국령시대에 건설되었는데, 레바논에서 연장되어 남다마스쿠스를 거쳐 요르단에 이르는 것과 홈스·알레포를 경유하여 터키·이라크로 이어지는 국제철도가 있다. 이들은 홈스-알레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경에 의해 분단되어 국내교통망으로서의 기능은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댐 계획의 일환으로 지중해 연안 항구 라타키아에서 알레포를 경유하여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내륙을 횡단하여 터키 국경의 카미슐리에 이르는 새로운 중심노선을 건설중이다.

자동차 교통은 활발하며 다마스쿠스에는 국제버스와 국제합승택시도 있다. 해운은 지중해에 접한 라타키아·바니야스·타르투스 등 3항구가 있는데 라타키아가 최대의 무역항이며 송유관이 닿는 바니야스항은 석유의 적출항이다. 다마스쿠스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

시리아의 사회·문화
주민의 대부분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이지만 이 밖에도 여러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터키 국경지대 쿠르드인과 다마스쿠스·알레포의 아르메니아인, 그 밖에 유대인·아시리아인·터키인도 있다. 사막이나 스텝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아랍인은 베두인이라 한다. 외국인으로는 1948·1967년 중동전쟁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 25만 명, 레바논내전 때 들어온 난민도 100만에 가깝다.

종교는 주민의 85%가 이슬람교도이지만 여러 종파로 나누어져 지역이나 부족에 결부하여 분포하고 있어 정치적으로도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수니파는 도시에, 알라위파는 라타키아지방, 이즈마일파는 하마주, 드루즈파는 수와이다지방에 많다. 소수파인 알라위파나 드루즈파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특히 알라위파는 정계·군부 안에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도를 제외한 나머지 15%는 그리스도교도로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다. 이 밖에 소수이지만 유대교도도 살고 있다.

교육은 6년간 무상 의무교육제도이다. 중동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학교교육 보급이 앞서 있는 편이다. 대학은 다마스쿠스대학·알레포대학 및 라타키아의 티슈린대학과 홈스에 석유전문학교가 있다.

신문은 전국지에 바스당 기관지 《바스》 《티슈린》 《아사우라》가 있고, 《알레포》 《홈스》 등 지방지도 발행되고 있으며, 영자신문 《시리아 타임스》도 있다. 방송은 국영인 라디오·텔레비전국이 독점하며, 아랍어 외에 프랑스어·영어·터키어 방송이 있다. 통신도 시리아국영통신(SANA)이 독점하고 있다.

시리아는 과거의 역사 가운데 여러 민족과 여러 문화가 뒤섞여 들어왔기 때문에 많은 유적과 건조물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제국에 멸망당한 사막의 상업중계도시 팔미라인데 구경만 하는데도 이틀이 걸리는 규모가 큰 유적이다.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는 이슬람 건축 최대의 걸작이다. 8세기 전반에 세워진 이 사원은 19세기 말의 화재로 대부분의 장식이 소실되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의 독창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알레포나 라타키아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에는 12세기 비잔틴제국과 십자군이 구축한 성채가 많이 남아 있다. 지중해 연안 타르투스 해안은 여름 보양지로 유명하다.

시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북한 단독수교국이다. 북한과는 1966년 7월 수교하였다. 한국과는 미수교 상태이나 1998년 11월 다마스쿠스 고위급 회담에서 경제협력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2003년 대한수입액 2억 7386만 달러, 대한수출액 225만 달러이다. 2003년 교민 1명, 체류자 18명이다.

 

 

시리아 - 서아시아 국가 시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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