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8일 수요일

이라크 - 서아시아의 전쟁국가 이라크

이라크 - 서아시아의 전쟁국가 이라크

 

 

이라크 (Republic of Iraq)

서아시아에 위치한 나라. .
설명
서아시아에 위치한 나라. 정식명칭은 이라크공화국(al-Jumhūrīyah al-'Irāqīyah)이다. 면적 43만 7072㎢. 인구 2537만 4000명(2004). 북쪽은 터키, 동쪽은 이란, 서쪽은 시리아와 요르단,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인접해 있으며 남부 일부가 페르시아만에 면해 있다. 수도는 바그다드.

이라크의 자연
이라크는 크게 3지역으로 나뉜다. 국토의 중앙부를 흐르는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 북쪽에서 북동쪽을 경계 짓는 쿠르디스탄지방의 산악지역, 그리고 서부·남서부를 차지하는 시리아·아라비아대지(臺地)의 사막지대이다. 그 중에서도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평원은 이라크 총면적의 82%를 차지하며 이라크의 자연환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은 티그리스강 연안의 사마라와 유프라테스강 연안의 히트를 잇는 선으로 상류지역과 하류지역으로 나뉜다. 상류지역은 해발고도 500m 정도의 기복이 심한 자지라구릉으로 되어 있으며 유출구가 없는 수많은 와디(Wadi)로 된 소분지(小盆地)를 이루고 있다. 하류지역은 충적평야로서 이라크 관개농업의 중심지대이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한 샤트알아랍수로(水路) 연안은 갈대가 무성한 소택지(沼澤地)를 이룬다.

쿠르디스탄산지는 이란·터키국경에 인접해 있으며 이란의 자그로스산맥에 이어지는 가파르고 험한 습곡산맥으로서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높은 산도 있다.

티그리스강의 본류나 그 지류인 대(大)자브강·소(小)자브강이 관류하는 평원 일대가 고대 아시리아 땅이었다. 이라크의 서부와 남서부를 차지하는 사막지대는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저지에서 차츰 높아져서 해발고도 1000m에 이르는 고원을 이루고 있다.

북부는 시리아사막의 연장이며, 남부의 하자라사막은 사우디아라비아 네푸드사막의 북쪽 경계선을 이룬다. 사막지대에는 메소포타미아평원 쪽으로 많은 와디가 형성되어 있는데, 가장 큰 하우란와디(Wadi)는 전체길이가 480㎞에 이른다.

기후는 저지에서는 5~10월의 건조하고 무더운 여름과 12~3월의 비교적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겨울의 두 계절이 있는데 산지의 겨울은 매우 춥다. 바그다드의 7월평균기온은 34℃이고 한낮에는 그늘에서도 43℃나 되는데, 주민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낮에는 지하실에서 보낸다. 특히 1921년 7월 8일 바스라에서 관측된 58.8℃는 세계 최고의 기록이다.

강수량은 쿠르디스탄산지에서는 연간 400㎜를 넘지만, 남서부쪽으로 갈수록 차츰 감소되어 바그다드에서는 150㎜ 전후에 지나지 않는다. 사막지대는 한층 더 건조하여 농경이 불가능한 불모지이다. 그러나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을 비롯한 크고 작은 지류는 쿠르디스탄산지, 터키의 산지, 그리고 고원의 강수 등이 모여 흐르는데 유수량은 풍부하다.

이라크의 역사
메소포타미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BC 3000년 무렵 수메르는 자신들의 문자(文字)를 가진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였다. 이어서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바빌로니아왕국과 신(新)바빌로니아왕국이, 티그리스강 상류에는 아시리아왕국이 일어나 번영하였다.

그러나 BC 539년 이란의 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가 정복한 이후 이라크는 알렉산드로스대왕, 파르티아왕, 사산왕조페르시아 등 외부세력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다.

7세기 중엽 이슬람교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났는데,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교도단은 이라크를 지배하고 있던 사산왕조의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초기 옴미아드왕조시대에 이슬람제국의 중심은 시리아에 있었으나, 749년부터 아바스왕조시대가 시작되면서 수도는 이라크의 알쿠파·바그다드에 설치되어 당(唐)나라의 장안(長安),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번영을 누렸다.

그 뒤 아바스왕조는 차츰 세력을 잃었고, 이란·중앙아시아·이집트·북아프리카에 계속해서 독립정권이 생겨나자 경제적 주도권도 이집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1258년 아바스왕조는 몽골에게 멸망당했으며 바그다드는 황폐화되었다. 더욱이 14세기 말에 티무르가 이끄는 몽골군이 공격해 들어와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관개시설을 파괴하였다.

1534년부터 제1차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이라크는 오스만 투르크의 속주(屬州)로서 지배를 받게 되어 여러 차례 터키군과 사파비왕조의 이란군이 싸우는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제1차세계대전 때에는 터키가 독일·오스트리아측에 참전하였는데, 영국군과 인도군이 바스라 부근에 상륙하여 1918년 터키를 제압하고 이라크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이라크 내에서는 민족운동이 고조되어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920년 산레모회의에서 이라크의 위임통치권을 승인받은 영국은 1921년 메카의 하심가(家) 출신인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맞아들여서 위임통치를 실시하였다. 파이살국왕은 그 뒤 여러 차례 영국과의 조약을 개정하면서 독립으로 나아갔으며, 1932년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독립을 성취하였다.

제2차세계대전과 전쟁 뒤의 혼란이 석유이윤으로 인해 경제가 윤택해지기 시작한 1953년에, 젊은 파이살 2세가 즉위하였다. 국왕의 지지 아래 누리 아사이드가 총리로서 독재적인 지도력으로 정국도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58년 7월 카셈 준장이 이끄는 군사쿠데타로 국왕·황태자와 많은 왕족과 총리 등이 살해되고 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라크의 정치
1958년 쿠데타로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꾼 이라크의 카셈정권은 바그다드조약(뒤의 중앙조약기구, 약칭 CENTO)에서 탈퇴하고 중립주의정책과 친(親)소련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뒤 국내에서는 군부의 반란, 공산당 세력의 증대, 쿠르드족의 반란, 대외적으로는 이란과의 샤트알아랍수로의 영유권문제, 쿠웨이트합병 등을 둘러싸고 지도층에서 대립이 생겨 정치정세의 불안이 계속되다가 1963년 2월 바스당(黨) 장교단이 일으킨 쿠데타로 카셈정권은 붕괴되었다.

새 정권의 아리프대통령은 얼마 뒤 군부와 협력하여 바스당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결과 친이집트파가 대두하여 단일정당인 <아랍사회주의자연합>을 설립하고 주요기업의 국유화 등 일련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내세웠다. 여러 차례의 정변 뒤 1968년 7월, 온건파인 바크르장군 등이 일으킨 쿠데타로 바스당정권이 성립되었고, 바크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1970년 9월에 잠정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바스당 내의 내분은 격렬했으며 쿠데타 시도는 계속되었다. 한편, 1972년 소련과의 우호협력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미국의 세력 아래 있는 이란과의 대립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전부터 계획했던 이라크석유회사(IPC)의 국유화를 단행했으나 대폭적인 원유생산량의 감소는 국민경제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한편 서방측 거대 석유자본과의 분쟁은 국내여론의 통일과 민심을 결속시켰으며 바크르정권을 안정시켰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이란의 팔레비국왕과 국교를 회복하고, 1975년 두 나라 사이의 국경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이란은 이라크 내에서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무장봉기한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는데 동시에 이라크 정부군은 쿠르드족에게 총공세를 가하여, 15년 동안 계속되었던 쿠르드족의 해방투쟁을 일단 진압하였다.

중동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이라크와 소련 관계는 197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악화되었다. 그 원인은 대외정책의 차이, 소련 일변도에서의 탈피 등이었으며 그 밖에 이라크 내 쿠르드족에 대한 소련의 지원도 이라크정부를 자극하였다.

1978년 이집트-이스라엘평화협정, 1979년 이란혁명 등 격변하는 중동정세 속에서 1979년 7월, 11년 동안의 장기집권 끝에 바크르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고 후임으로 실권을 쥐고 있던 S.T. 후세인 혁명지도평의회부의장이 취임하였다.

이라크는 1980년 9월, 혁명 뒤의 혼란 속에 있는 이란에 대하여 전(前)국왕과의 협정파기를 선언하고, 이어서 이라크기(機)로 이란 영내를 침공하여 이란-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단기전을 노렸던 후세인대통령의 의도와는 달리 시아파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군은 사기가 높아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1982년 이란은 점령당했던 도시를 탈환하였으며, 6월에는 이라크의 일방적 정전·철수로 전쟁은 종결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쟁 뒤 배상을 둘러싼 분쟁은 계속되었다. 이란군이 이라크를 역침공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자, 급진적인 회교혁명의 확산을 원치 않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회교 소수민족문제를 안고 있는 소련·사우디아라비아 등 온건아랍국가들이 이라크를 원조하였다.

그리고 리비아·북한과 같은 급진적이며 교조적인 국가는 이란을 원조함으로써 전쟁은 장기소모전으로 변모했다. 1987년 7월 이 지역의 원유수송의 안전을 이유로 미국이 직접 개입하고 이라크가 이란에 대해 화학무기를 무차별 사용하자, 이란은 1988년 7월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조를 수락한다고 발표하여 8년간에 걸친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8년 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샤트알아랍수로의 영유권문제는 해결되지 못함으로써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았다. 이라크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끝나고 그 뒤 국내 정세의 불안과 경제난이 계속되자 이라크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점령하였다. 이에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는 같은 날, 이라크군의 무조건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라크가 이를 거부하자 같은 해 8월 5일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특전단을 파견하였다. UN에서는 11월 29일, 이라크군이 철수에 응하지 않을 때는 다국적군으로 하여금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결의했다. 이라크가 철수시한인 1991년 1월 15일을 넘기자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은 같은 해 1월 17일 공격을 감행하여 <걸프전쟁>이 일어났다.

일방적인 다국적군의 공격에 불리해진 이라크는 같은 해 2월 18일, 소련이 제시한 타협안을 수락함으로써 2월 28일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였다. 걸프전 이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량살상무기(WMD)와 장거리 미사일 폐기, 국제연합의 무기 사찰을 받아들일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 결의를 받아들일 것을 이라크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라크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그 뒤 12년 동안 갈등관계를 이어왔다.

2001년 9월 미국테러참사(9·11테러)가 일어난 뒤 2002년 1월 미국은 북한·이란과 함께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여 자국민 보호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대외명분을 앞세워 영국·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이라크를 공격함으로써 <이라크전쟁>이 일어났다. 미·영연합군은 3주 만에 바그다드를 함락시켰으며, 같은 해 5월 1일 미국 대통령 G.W. 부시는 종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종전 이후에도 이라크 내 저항세력의 연합군과 미군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민간인 희생자까지 나오는 등 이라크 전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003년 12월 마침내 후세인이 체포됨으로써 전후 이라크 상황 전개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2004년 6월 미 군정과 과도통치위원회는 이라크 과도정부에 권한을 이양하였다. 과도정부 대통령은 가지알 야와르, 총리는 이야드 알라위가 취임하였다. 2005년 1월, 총선을 실시하여 시아파 정당 연합체인 유나이티드이라크연맹(UIA)이 47.6%를 얻어 최다 득표했으며, 주요 쿠르드 정당 2개로 이루어진 쿠르드연맹리스트(KAL)가 각각 25.4%와 13.6%를 득표했다. 총선에서 승리한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차기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이라크의 경제·산업
이라크는 1958년의 공화제혁명 이래 기본적으로는 사회주의화를 추진하면서도 경제분야에서는 정경분리(政經分離)에 따라 서방측 나라들과 협력을 추진하였다. 이라크의 경제는 석유와 농업 두 분야에 의존하고 있는데 재정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석유가 압도적으로 많아 85%에 이른다. 원유의 연간 생산량은 1997년에 2억 1467만 8000배럴, 2001년에 8억 5322만 5000배럴을 기록하였다.

한편, 취업인구면에서 보면 농업부문이 30% 이상의 비율을 차지한다. 1972~1975년에 걸쳐서 IPC(영국·미국·네덜란드·프랑스 자본) 및 그 관련회사를 국유화한 정부는 적극적인 석유정책을 폈는데, 새로운 유전탐사 및 개발과 키르쿠크·아인자라하·주바이르 등 주요 유전의 확장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발노력의 결과 1975년 당시 240만 배럴(1일 생산)에 불과했던 산유량은 1979년 전반에 330만 배럴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란-이라크전쟁과 1990년 쿠웨이트 침공에 따른 다국적군의 폭격으로 석유 적출시설이 파괴되고, 시리아를 경유하는 파이프라인이 폐쇄됨으로써 산업의 생산기반이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빚었다. 더욱이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UN의 경제봉쇄로 원유수출마저 제재를 받게되어 더욱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국토면적의 절반 이상이 불모지이며 경지면적은 17%에 불과하므로 농업부문은 상당히 부진하다. 더구나 천수경작(天水耕作)이 가능한 토지는 연강수량이 400㎜가 넘는 북부의 산악지대뿐이다. 주요한 농업지대인 메소포타미아평원은 관개에 의존하고 있으며 참밀·보리 등을 재배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벼를, 북부의 산지에서는 과일·담배를 재배하고 있다. 예전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추야자 생산국이었으나 점차 생산량이 격감하고 있으며, 걸프전쟁 이후 계속된 흉작으로 식량부족사태까지 겪었다.

토지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958년부터는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집단농장화·기계화를 추진, 댐건설·관개시설 정비·새 농지 개척·품종개량 등 농업부문의 투자를 늘리기도 하였다.

제조업은 식품가공·직물·연와제조·제혁(製革) 등의 전통산업과 더불어 시멘트·석유정제·석유화학·철강·기계 등 근대공업이 있다. 석유파동 이후 1970년대 중엽 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공업화에 힘을 기울인 결과 석유정제공업은 매우 높은 신장률을 보였고 식품공업·비금속건재공업 등도 빠른 성장을 보여왔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으나 계속된 쿠데타로 중단되거나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고, 대체로 공업의 현대화는 종래의 수출전용 계획에서 농업관련산업과 소비재산업으로 전환하여 농촌소득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노동자들을 양성, 공업화 기반을 충실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무역은 전체 수출의 98%를 차지하는 원유와 석유제품이 두드러진다. 주요수출 대상국으로는 요르단·이탈리아·프랑스·브라질·터키, 주요 수입품은 기계류·수송기계·곡물류·철강·섬유제품, 수입상대국은 독일·미국·프랑스·영국·이탈리아·일본 등이었으나, 걸프전쟁 이후 수출과 수입에 UN의 제재를 받게 되면서 수입상대국도 요르단·터키·헝가리·스위스 등으로 변화되었다.

2003년 3월 20일 발발한 이라크 전쟁으로 인하여 난민들의 대규모 약탈과 미군의 폭격으로 많은 건물과 시설들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라크는 걸프전에서 입은 피해가 회복되기도 전에 나라의 주요 시설이 다시 파괴되어 빈사상태가 되었다.

각 금융기관들은 재원부족과 민간투자 유치의 어려움으로 이라크 경제개건에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이라크 경제가 직면한 가강 큰 문제는 대량 실업사태로, 총인구의 절반이 실업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003년 9월, 석유를 제외한 이라크의 모든 경제 부문에 외국인 지분 투자를 100% 허용하는 획기적인 경제계획안을 발표하는 한편 10월 사담 다나르와 스위스 다나르를 폐지하고 새로운 화폐 <이라크 다나르>를 발행했다. 또한 12월에는 독일·프랑스·미국은 이라크 경제복구의 걸림돌인 12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외부채를 경감하기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2004년 6월 이라크 과도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신경제정책이 부상하는 가운데 과거 국가 주도의 중앙계획에서 벗어나 새 자유경쟁시장 체제로 전환할 것을 모색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앞으로 4년간 360억 달러의 재건자금이 필요하다고 예상하였다. 2004년 2월, 세계은행은 이라크 재건프로그램에 본격 착수하였다. 재건 기술지원에 500~1000만 달러가 소요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라크의 사회
주민은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아랍인이 전체의 6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소수민족 가운데서는 쿠르드인이 가장 많으며 총인구의 23%를 차지한다. 북서쪽 쿠르디스탄지방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데, 이란·터키·시리아에 걸친 페르시아계 주민이다. 민족도 언어도 아랍인과는 다르고 자치권을 요구하며 오랫동안 중앙정부와 대립해 왔다. 이 밖에 북이라크의 터키인, 중앙부의 이란인을 비롯하여 아시리아인·아르메니아인·야지디인·사바크인·사바인·유대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언어는 공용어인 아랍어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한편 북부에서는 쿠르드어와 터키어가 일반적이며 동부 부족 사이에서는 페르시아어의 방언도 쓰이고 있다.

종교도 이라크주민을 나누는 중요한 요소이다. 총인구의 95% 이상이 이슬람교도인데 정통파인 수니파와 분파(分派)인 시아파로 양분된다. 수니파는 바그다드와 바스라시민을 비롯한 아랍인과 쿠르드인, 시아파는 그 성지(聖地) 카르발라 주변의 아랍인과 이란인이다. 그리스도교도는 네스토리우스파·그레고리우스파·그리스정교·아르메니아정교 등 각파를 합하여 20만 명 이상이 있다고 짐작된다. 그 밖에 약간의 유대교도도 있다.

수도인 바그다드와 바스라·모술 등 3대도시를 비롯한 각 도시는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편, 농촌지역의 가옥은 햇볕에 말린 흑벽돌을 쌓아올린 것으로서 전기·수도도 없이 사는 것이 보통인데, 오락은 노천다방에 모여 커피 등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정도이므로, 이런 단조로운 생활을 깨기 위해 이슬람교의 제례나 결혼식 등은 성대히 거행된다.

교육은 6~12세의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중등교육까지 3년간 연장하는 것이 검토되고 있다. 또한 1974~1975년,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교까지의 교육 전과정에서의 무료화 및 공립화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걸프전에 이어 이라크 전쟁까지 연거푸 겪은 이라크로서는 그러한 이상적 교육정책의 실천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라크의 문화
고대문명이 번영했던 이라크는 유적과 옛 건축물이 많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에는 우르·에리두·우루크 등의 고대 수메르유적이 있고, 바그다드 남쪽에는 바빌로니아·신바빌로니아의 수도로 영화를 자랑했던 바빌론의 유적도 있다. 이러한 유적의 출토품들은 바그다드의 이라크박물관에 전시하였다. 바빌로니아제국 뒤에 일어난 아시리아제국의 무대는 티그리스강 상류인 북부 이라크였다. 그 대표적인 유적은 북부의 중심지 모술 근교의 니네베와 니르루드, 그리고 남쪽 약 60㎞ 지점에 있는 아수르의 성벽과 궁전터이다. 아시리아제국이 붕괴된 뒤 이주해 온 베두인족에 의해 만들어진 하트라거리의 유적은 아수르의 남쪽에 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겨울 수도 쿠테시폰은 바그다드 남동쪽 약 30㎞ 지점에 있으며, 고대유적 중 최대의 아치를 가진 왕궁터가 남아 있다.

신바빌로니아제국이 멸망한 이래 이란에게 문화의 중심을 빼앗긴 메소포타미아는 8세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는 아바스왕조 문화가 꽃피었다. 바그다드와 그 북쪽 120㎞ 지점의 사마라에는 왕궁터·모스크 및 모스크의 뾰족탑과 나선상뾰족탑 등이 있다. 이러한 고대문화의 유적은 정부의 고고문화국 관할 아래 있으며 발굴·조사·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슬람교 시아파의 시조 알리와 그 아들 후세인의 묘소가 있는 나자프와 카르발라의 모스크는 단순한 유적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성지로 여겨 신도들의 두터운 신앙을 결집하고 있으며, 이란·파키스탄으로부터도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2003년 3월 27일 일어난 이라크 전쟁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귀중한 유물과 유적들이 전쟁의 참화를 크게 입었으며, 또한 대량으로 도난당했다.

이라크와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 이라크는 1981년 서울과 바그다드에 총영사관을 상호 설치하기로 함으로써 정치·문화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1982년 뉴스교환협정, 1985년 항공협정 및 문화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이라크 기술훈련생들이 한국에서 연수기회를 갖는 등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1989년 상호수교로 이어져 같은 해 7월, 두 나라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경제분야에서의 협력은 한국이 수교전인 1977년 3월부터 이라크에 진출한 이래 1987년까지 11개 업체가 71건의 공사를 수주하여 한국의 해외건설시장에서 3번째로 큰 대상국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건설인력 진출도 활발하여 1982년 2만 명, 1988년 약 6000명을 기록하였다.

1991년 걸프전쟁이 터지면서 주이라크대사관을 잠정적으로 폐쇄하였다. 2000년 2월 이라크시장 개척을 위해 한국 민·관경제대표단을 파견하였다. 통상면에서는 2003년 대한수입 5730만 달러, 대한수출 4억 281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1999년 10월에는 바그다드에 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무역관을 재개한 데 이어 2000년 2월에는 이라크와의 경제협력 재개를 위해 민관경제 대표팀을 파견한 바 있다.

이라크전쟁으로 한국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2003년 5월 이라크 남부 나시리아 지역에 건설공병부대인 서희부대 573명과 의료지원단으로 이루어진 제마부대 100명을 파견하였다. 2004년 8월에는 이라크 북부 아르빌 지역에 전투병과 재건지원병으로 구성된 3000명의 자이툰부대를 추가로 파병하였다.

한편, 북한과는 1968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이란과의 전쟁발발 뒤 북한이 이란을 지원함으로써 1980년 10월 단교하였다. 1992년 5월 북한과의 외교관계 복원에 원칙적 합의했으며, 제3국 주재 양국 공관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협력관계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북한과의 통상은 1986년 대북한수입 600만 달러, 대북한수출 16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이라크 - 서아시아의 전쟁국가 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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