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아와 마오를 통해 본 숙명의 한·일 라이벌 관계
라이벌의 사전적 의미는 '같은 목적을 가졌거나 같은 분야에 일하면서 이기거나 앞서려고 서로 겨루는 맞수'다. 한마디로 막상막하인 경쟁 상대이다.
라이벌은 기량 발전의 원천이다. 항상 자극을 주고 분발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혼자서 커 나갈 수 없다. 그래서 라이벌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라이벌 관계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계 라이벌, 재계 라이벌, 문화계 라이벌 등등..
특히 피말리는 승부를 벌이는 스포츠계에서 라이벌은 확연히 드러난다. 바둑계에서는 조훈현 9단과 서봉수 9단은 '라이벌의 고전'으로 통한다. 1953년 동갑내기인 이들은 37년동안 363번이나 반상에서 만났다. 조훈현의 승률이 훨씬 높지만 서봉수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그의 가치는 훨씬 돋보였다.
밴쿠버는 연아가 우승했지만, 토리노 세계선수권은 마오가 우승했다.
밴쿠버 올림픽으로 눈을 잠시 돌려보자. '피겨 퀸' 김연아는 소름을 돋게하는 완벽한 연기로 금메달을 목에 걸며 국민들에게 감동을 선사했다. 그의 연기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2번의 트리플 악셀(3바퀴 반 회전)을 성공시킨 스무살 동갑내기 아사다 마오였다. 라이벌이 있었기에 김연아는 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빙판에서 자신을 혹독하게 담금질 할 수 있었다.
올림픽 이후 이들은 28일 끝난 이탈리아 토리노 세계선수권에서 다시 맞붙었다. 이번에는 아사다가 우승, 김연아가 준우승이었다. 무엇보다 김연아-아사다의 대결에는 팬들을 열광케 하는 단어가 존재한다. 바로 '한-일전'. 민족 감정까지 보태져 이들의 드라마는 숨이 막히면서도 극적이었다.
▶한일 개인전은 자존심 싸움의 백미
한·일전은 연날리기를 해도 재미나고 치열하다. 결코 질 수 없는 승부여서다. 무엇보다 국가경쟁심의 대리전이었다. 한일 개인전의 원조는 프로레슬러 김일과 안토니오 이노키의 대결이 꼽힌다. 1960년대 시대상을 반영하듯 김일은 한민족의 한을 대변하는 영웅이었고, 이노키는 일본의 자존심으로 통했다. 축구와 야구 등 프로종목이 없었던 시대에 레슬링은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김일의 전매특허는 박치기였고, 주걱턱으로 유명했던 이노키는 따귀 때리기의 고수였다. 김일은 당시 TV 시대의 첫 스포츠 스타였다. 그의 경기가 벌어지는 날이면 동네마다 흑백 TV가 있는 이장집에 모여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 박치기로 승부를 뒤집을 때마다 지켜보는 사람들의 속은 후련했다.
사실 김일과 이노키는 역도산의 제자였다. 국적이 달라 친구에서 라이벌로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38차례 붙었다. 김일이 9승28무1패로 우세했다. 결과적으로 이노키는 김일의 들러리였지만 이들은 링에서 '투혼의 승부'로 라이벌전의 묘미를 전달했다. 이노키는 2006년 김일의 장례식때도 참석해 남다른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김일-이노키 시대가 막을 내린 뒤 한일 양국은 얼음판에서 두명의 천재 스케이터를 배출했다.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 이들은 주니어 시절부터 경쟁을 시작해 성인무대의 꽃인 올림픽에서 멋진 승부를 연출했다. 역대 전적은 7승6패로 김연아가 우위에 있다. 주니어 시절에는 아사다 마오가 1인자 였다. 이들은 14세때인 2004년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아사다가 35.08점이라는 큰 점수차로 김연아를 눌렀다. 2005년에도 아사다의 우위였다. 하지만 승부근성이 뛰어난 김연아는 2006년에 아사다를 2인자로 밀어냈다. 아사다의 존재를 생각하며 땀을 흘린 결과였다. 이후에는 김연아의 페이스였다.
주니어 시절에는 마오가 1인자, 하지만 연아가 곧 마오를 2인자로 밀어냈다.
김연아는 2009-2010 시즌에 출전한 5개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지난해 2월 4대륙 선수권을 시작으로 3월 세계선수권, 그랑프리 1차와 5차 대회, 그랑프리 파이널 등 출전한 대회에서 모두 우승했다. 반면 아사다는 김연아의 독주를 지켜보며 부진의 늪에 빠졌다. 주니어 무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아사다는 우여곡절 끝에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한 뒤 밴쿠버에서 설욕을 노렸다. 하지만 자신의 주무기인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도 김연아의 '강심장' 앞에서 무너졌다. 당시 김연아와 아사다의 점수차는 23.06점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세계선수권에서는 절치부심한 아사다가 197.58을 기록, 김연아(190.79점)를 2위로 밀어내고 시상대 맨 위에 섰다. 승부는 갈렸지만 이들은 가장 위대한 연기로 피겨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는 한편 보는 재미도 배가시켜 피겨의 저변 확대에 큰 공을 세웠다.
▶한일전의 꽃 '축구와 야구'
단체 종목은 개인전과는 달리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다른 나라에게는 질 수 있어도 서로에게는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한·일전에 나서는 선수들의 마음가짐도 너무 비장했다. 패배는 굴욕과 함께 너무 큰 상처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두 나라의 국민적 스포츠인 축구가 대표적이다. 역대 한일전은 '감독들의 무덤'이었다. 56년 한일전 역사를 통해 14명의 감독이 패배에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한국은 4명의 감독이 경질됐고, 일본은 10명이나 사퇴했다. 올해 설날에 벌어진 한·일전에서 한국은 3-1로 승리했다. 이로인해 일본대표팀 오카다 감독은 경질설에 휘말렸지만 월드컵을 목전에 두고 있어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났다.
축구의 한일전은 '감독들의 무덤'이다
역대 전적에서 한국은 39승20무12패로 절대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감독들의 무덤과는 달리 상대에게 비수를 꽂은 선수는 국민적 영웅이 됐다. 역대 한일전 최고의 매치는 1997년9월28일 도쿄에서 열린 프랑스월드컵 예선전이다. 한국은 0-1로 뒤진 상황에서 서정원의 헤딩골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뒤 이민성의 그림같은 왼발 중거리골로 대역전극을 만들어냈다. 지금도 '도쿄 대첩'으로 불릴 만큼 짜릿한 승부였다. 당시 중계방송에서 흘러나온 "후지산이 무너집니다"는 앵커의 멘트는 축구팬들의 가슴에 깊이 남아 있다.
90년대 한·일전을 대표하는 선수는 '닮은 꼴' 스타 홍명보와 이하라가 있다. 둘다 수비수로서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며 후배들을 이끌었다.
홍명보는 월드컵 4회 연속 출전과 함께 A매치 135경기 출전으로 한국 선수 최다 출장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이하라도 A매치 123경기에 나서 일본 선수 최다출장 기록을 갖고 있는 이하라는 1994년 아시안게임에서 한국과의 8강전에서 30m짜리 중거리 포로 강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홍명보는 1993년 미국월드컵 아시아예선에서 일본에게 패한 뒤 "또 다시 일본에게 지면 은퇴하겠다"는 발언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하라는 "홍명보만 없었다면 일본 축구가 이토록 한국에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선수시절 대결에선 홍명보가 5승2무1패로 이하라를 압도했다.
야구도 축구와 마찬가지였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 야구는 일본의 콧대를 여지없이 꺾어버리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2006년과 2009년에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진한 아쉬움을 남겼다. 두 번의 대회에서 한일 양국은 그야말로 혈전을 벌였다. 한국은 2006년 1회 대회에서 2승1패, 2009년 2회 대회 2승3패를 기록했다. 상대전적은 4승4패였지만 이상한 대진 방식에 때문에 우승은 일본의 몫이었다.
WBC를 통해 두 선수가 조명을 받았다. 한국의 이용규와 일본의 이치로다.
지난 1회 대회를 앞두고 이치로는 "이제부터 30년간 일본에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각인시키고 싶다"는 망언을 쏟아냈다. 그러나 한국에게 패배를 당한 뒤 "한국전 패배가 야구인생에서 최고의 굴욕이었다"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이어 2회 대회에선 "한국과 함께 (야구) 발전? 그런 거 없다"는 막말로 도발했다. 이치로의 경솔한 언행에 이용규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용규는 2회 대회 결승에서 일본에 아깝게 패한 뒤 시상식에서 목에 은메달을 걸지 않았다. 한국 선수로는 유일했다. 그는 "일본 선수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분하고 불쾌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용규의 말은 사연많은 한·일전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출처 : http://culturenori.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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