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30일 금요일

연금술사 - 소설 연금술사

연금술사 - 소설 연금술사

 

 

연금술사 (鍊金術師 The Alchemist)

영국 극작가 B. 존슨의 희극. .
설명
영국 극작가 B. 존슨의 희극. 1610년에 초연되었다. 주인이 역병(疫病)을 피해서 런던을 떠난 사이에 하인 페이스가 가짜 연금술사 사트르와 그의 애인을 집으로 끌어들여, 돈을 벌려고 모여드는 사람들 한테서 금품을 뜯는다. 그러던중에 갑작스럽게 주인이 돌아왔기 때문에 하인은 사트르를 쫓아내고 뜯어낸 금품을 주인에게 바치고는 용서를 받는다.

 

 

 

연금술사 - 소설 연금술사

개미 - 성실,부지런함의 상징 개미

개미 - 성실,부지런함의 상징 개미

 

 

개미 (ant)

벌목 개미과에 속하는 곤충의 총칭. .
설명
벌목 개미과에 속하는 곤충의 총칭. 전세계에서 기록된 개미는 약 1만 종류에 달하며 그중 한국에는 1과 26속 60여 종이 알려져 있다. 여왕개미를 중심으로 가족적인 집단생활을 한다. 일개미라는 날개가 없는 계급이 존재한다는 것, 가슴과 배 사이에 1마디, 또는 2마디의 복병결절(腹柄結節)이라는 소형의 독립된 체절(體節)이 있는 것, 여왕개미와 일개미의 더듬이는 첫째마디[柄節(병즐)]가 길고, 둘째마디 이하는 무릎 모양으로 접속하는 것 등의 특징이 있다. 개미는 원칙적으로 수캐미·여왕개미 및 일개미의 3계급이 있다. 수캐미는 무정란에서 발생하고, 체세포(體細胞)의 염색체(染色體)는 암컷의 반수이며, 일개미는 성적(性的)으로는 자성(雌性)으로, 발육부진(發育不振)인 상태로 성충이 되기 때문에 여왕개미보다 소형이며 날개가 없고 생식기관도 퇴화되어 있다. 일개미는 큰 것과 작은 것의 2종이 있으며 큰 것은 병정개미라고 한다. 병정개미는 특히 머리와 큰 턱이 발달되어 외적을 방어하거나 딱딱한 먹이를 잘게 부수는 역할도 하고 망을 보는 역할도 한다. 또 여왕개미라는 계급이 없고, 일개미의 산란(産卵)만으로 번식하는 그물등개미도 있다. 보통 여왕개미의 수명은 길어서, 10년 이상 생존하기도 하나, 일개미는 1∼2년이다.

 

형태
보통 여왕개미가 가장 크며, 수캐미, 일개미의 순서로 작아진다. 일개미의 몸길이는 2∼10㎜ 정도의 종류가 많으나, 작은뿔개미같이 1㎜ 미만인 것부터 14㎜에 달하는 검은왕개미 등이 있으며 동남아시아·남아메리카에는 3㎝에 달하는 것도 있다. 형태는 일반적으로 머리·가슴·배의 3부분으로 뚜렷이 구별된다. 머리부분은 크고 종류에 따라 형태는 여러 가지이며 수캐미는 그 크기가 작다. 큰 턱은 물건을 물거나 씹는데 적합하나, 식성과 습성(習性)에 따라 형상이 현저하게 다르다. 수캐미는 겹눈과 3개의 홑눈이 발달하며, 일개미는 퇴화한 홑눈이 남는 것도 있지만 소실된 것이 많고, 겹눈도 수캐미보다 소형이며 개중에는 완전히 소실되어 장님으로 된 종류도 있다. 더듬이는 기본적으로 수캐미가 13마디, 여왕개미와 일개미가 12마디로 되어 있으나, 이보다 다소 작은 것도 많다. 가슴은 앞가슴·가운데가슴 및 뒷가슴으로 이루어지며, 수캐미와 여왕개미에서 잘 발달되고, 벌과 닮은 2쌍의 막질(膜質)의 날개가 있다. 일개미는 나비와 두께가 작고, 가늘고 길며, 구조도 단순화되어 날개가 없다. 여왕개미의 날개는 이탈성(離脫性)이 있어, 교미 후에 스스로 떨어진다. 앞다리의 정강이마디 끝부분에는 솔털 모양의 가시가 있어 더듬이 등을 청소하는 데 쓰인다. 복병결절은 막대기꼴·비늘꼴·구슬꼴 등으로, 배의 둘째마디 또는 둘째·셋째마디에 해당하며, 보통 배로 부르는 부분은 이것들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다. 여왕개미나 일개미의 배 끝에는 독침이 있는 것과, 꼬리끝이 원뿔꼴로 개미산[蟻酸(의산)]을 방출하는 것이 있으며, 공격과 방어에 사용한다.

개미둥지
개미는 둥지를 본거로 해서 생활하며, 둥지는 땅속에 만드는 것과 지상에 만드는 것이 있다. 땅속에 만드는 것은 대부분 돌 밑이나 넘어진 나무 밑에 만들며 다소 불규칙한 통로와 방으로 되어 있고, 지면에 입구가 있는 것은 흙을 주위에 분화구(噴火口) 모양으로 올려놓거나 그 위에 가지·마른잎·마른풀 등을 쌓아올려 그속에 통로를 만드는 것도 있는데 이것을 개미총[蟻塚(의총)]이라고 한다. 곰개미는 해가 잘 드는 땅속에 둥지를 만드는데 깊이 2∼3m의 수직통로와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되어 있으며, 애벌레가 성육(成育)하는 계절에는 지표에 가까운 부분을 옆으로 넓히고, 그 출입구도 수를 늘린다. 지상에 만드는 것은 나무껍질 밑이나 나무를 자른 그루터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으며 나무에 매달린 둥지를 만드는 개미도 있다. 그물등개미는 돌이나 쓰러진 나무, 낙엽 속의 틈새 등을 둥지로 이용하고 수시로 둥지를 이전한다. 개미가 식물체를 둥지로 이용하고 서로 공생하는 것을 개미식물이라 하며 열대지방에서 볼 수 있다.

개미의 결혼
수캐미와 여왕개미는 기상조건(氣象條件)이 알맞으면 둥지에서 나와 공중으로 날아 올라 교미(交尾)를 하는데 이것을 결혼비행이라고 한다. 결혼비행의 시기·시간은 종류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으로 습도가 높고 맑으며 바람이 없는 날을 선택한다. 비행 중 교미가 끝나면 수컷은 곧 죽고 지상으로 돌아온 여왕개미는 날개를 떼어버리고 작은 틈을 찾아서 숨어 산란을 시작한다. 처음에는 소수의 알을 낳는다. 여왕개미는 애벌래가 부화하면 침[唾液(타액)]을 주어서 기르지만, 몇 마리의 일개미가 나와서 일하게 되면 둥지 안의 노동은 중지하고 산란에만 전념하게 된다. 개미는 완전변태를 하며 알 → 애벌레 → 번데기 → 성충의 순서로 발육한다. 알은 둥글거나 길쭉하고 표면에 광택이 나며 서로 느슨히 점착(粘着)되어 있다. 애벌레는 백색 또는 유백색으로 다리가 없으며 구더기 모양이다. 일개미는 집 밖에서 먹이물질을 모으고, 집을 방위하며 애벌레와 여왕개미를 보살피는 등 노동을 하는데, 다소의 분업이 엿보인다. 많은 종류에서는 일개미가 먹이를 소낭에 저장하고, 조금씩 토해내어 입에서 입으로 동료들에게 나누어준다. 둥지냄새로 동료를 식별하고, 몸 여러 곳에 있는 분비선(分泌腺)에서 방출되는 미량의 냄새물질과 몸짓 등으로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여, 개미의 집단(사회)은 정연하게 활동한다.

 

 

개미 - 성실,부지런함의 상징 개미

인어공주 -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

인어공주 -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

 

 

인어공주 (人魚公主 Den lille Havfr...)

H.C. 안데르센의 동화.

 

설명
H.C. 안데르센의 동화. 1837년에 간행되었다. 15세가 되어 처음으로 바다 위로 나온 인어공주는 배를 타고 있던 왕자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폭풍우로 왕자가 탄 배가 침몰하자 필사적으로 왕자를 구출했지만 의식을 잃은 왕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공주는 마녀에게 자기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주고 사람의 모습이 된 다음 왕자가 사는 성에 들어가 시녀가 된다. 그러나 왕자는 공주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한다. 왕자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 공주는 사람도 되지 못하고 인어로도 되돌아갈 수 없게 되어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지는데 그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 안데르센의 동화 가운데서는 가장 초기에 속하는 작품이지만, 정경(情景)과 문장의 아름다움, 사랑의 지순(至純)함 등으로 안데르센동화의 진면목을 보여준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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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

어린왕자 -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왕자

어린왕자 -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왕자

 

 

어린왕자 (-王子 Le Petit Prince)

프랑스 작가 A. 생텍쥐페리의 동화.

설명
프랑스 작가 A. 생텍쥐페리의 동화. 미국 망명중이던 1943년에 쓴 환상적이고 시적인 동화로서, 비행사였던 생텍쥐페리는 사하라사막 오아시스에서의 생활 및 아라비아의 조난에서 많은 소재와 내용을 얻었다. 내용 가운데 멀리 소혹성에서 온 어린 왕자에게 한 마리의 여우가 나타나 본질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상대를 길들여 진정한 친구가 된다는 것 등의 진리를 가르쳐주어, 왕자는 자기가 책임져야 할 장미꽃의 존재를 깨닫는다. 한편 어른들에 대한 철저한 실망과 불신감도 나타내고 있다. 생텍쥐페리는 비행사로서 하늘을 날면서 개인과 세계와의 관계,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탐구하였으며, 문명사회에서 다시 그 둘을 결합시켜야 한다는 커다란 꿈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 왕자》는 이러한 사상과 명상적인 내면세계가 반영된 시적이며 휴머니즘이 감도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왕자 - 생텍쥐페리의 동화 어린왕자

신 - 절대자 신

신 - 절대자 신

 

 

신 (神 god)

종교의 대상으로서 초인간적·초자연적 위력을 가지는 존재. .
설명
종교의 대상으로서 초인간적·초자연적 위력을 가지는 존재. 신에 대한 관념의 내용은 그것을 분류, 정리하고 정의하는 방법에 따라서 커다란 변화를 나타낸다. 철학자들은 그것을 만물의 존재 근거이며 절대자라고 생각하고, 신학자들은 초월적인 구원의 신이라고 한다. 또 신화학자들은 그것을 자연신 또는 의인화된 신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분류하고, 종교인류학자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나 넋이나 조상의 신령, 또는 마나(mana)와 같은 주술과 신들과의 상호관련성을 문제삼았다. 그 밖에 일신교와 다신교의 양극을 세우고, 그 중간 영역에 여러 가지 신에 대한 관념의 변화형을 지적하는 종교학자들도 있는가 하면, 신에 대한 관념의 발달에도 진화와 퇴화가 있다고 하는 사회학자들도 있다. 또 농경사회나 수렵사회와 신관념의 대응을 추구하거나, 성성(聖性)과 신성이라는 틀에 의하여 신의 윤곽을 밝히려고 하는 입장들도 있다. 신관념에 관한 해석이 이처럼 천차만별인 것은, 신이 인간의 상상력의 소산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존재증명>을 시도하려고 한 종교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끊임없이 많았고 그 시도는 언제나 성공하지 못했다. 고대에 신의 본질을 존재의 근거라든가 절대적인 것으로서 파악한 것은 그리스철학과 같은 이성적인 사변이나 스콜라철학과 같은 그리스도교적인 사고였다. 그 뒤 세계 여러 지역에서 종교현상의 이질성이 밝혀짐에 따라, 신에 관한 사고방식이나 이론에도 다양한 전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첫째, 세계의 여러 종교를 다신교(그리스·로마·이집트·한국·일본)인가 일신교(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인가에 따라서 정리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즉, 주로 고대국가의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다신교의 신 중에서 때에 따라 특정한 한 신만을 중요시하는 단일신교나 교체신교(交替神敎;고대인도의 베다종교), 오직 하나의 신만을 절대시하는 일신교, 그리고 모든 존재물에 신적인 것의 내재를 상정하는 범신교(불교)의 분류가 그것이다. 둘째, 신을 인격적(형태적) 존재와 비인격적 존재로 나누는 사고방식이다. 우선 인격적인 신은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에서와 같이 비형태적인 경우도 있지만, 주로 다신교적 세계에 등장하는 의인화된 신이나 인간적 속성을 가진 자연신, 또는 문화신이나 영웅신 등과 같이 형태적인 경우가 많다. 이와는 달리 비인격적인 신은 마나와 같은 주력이나 디먼(demon)과 같은 영험력의 관념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겨지며, 비형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디먼은 때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모습으로 형태화하는 수가 있지만, 그 본래의 태생은 마나적인 것이다. 셋째, 신의 관념을 현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성스러운 것> 또는 인간의 전신적 투기(全身的投企)를 의미하는 <궁극적 관심> 등과 같은 관념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이론을 들 수 있다. 이 견해는 신을 그 형태성이나 속성에 의하여 규정하려고 하는 방식에 대해서, 인간의 심리적인 감수성이나 주체적인 의식에 의거해서 신적 존재의 상징성이나 실재성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넷째, 신적 존재를 높은 차원의 신과 낮은 차원의 정령의 2종류로 분류하고 그 양자와 인간과의 역학적인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시도를 들 수 있다(M. 베버). 즉 앞의 것은 신 앞에 인간이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신봉사(神奉仕;Gottesdienst)>형이고 뒤의 것은 인간이 정령을 불러서 그 가호를 구하는 <정령강제(精靈强制;Geisteszwang)>형이다. 인간의 섬김을 받는 신과 인간에 의하여 조작되는 정령이라는 이분법이다. 이와 같은 신관념의 발전이나 유형에 관한 종교학적인 이론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생겨났고, 그 발상의 기반도 크거나 작거나 그리스도교적 관념의 강한 투영을 받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틀을 제거하면 신의 세계는 크게 자연신·인간신·초월신의 3종류로 구별할 수 있다. 자연신이란 일월성신(日月星辰)이나 풍우뇌운(風雨雷雲)과 같은 천체·기상현상을 신격화한 것이며, 또 나무나 돌 등의 자연물에 정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것을 신성화한 것이다. 인간신이란, 인간을 신격화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남신·여신, 선신·악신, 창조신·파괴신, 영웅신·문화신, 인간의 생활기능을 관장하는 농신(農神)·공신(工神)·수렵신·어로신 등의 기능신이나, 공동체의 번영과 운명을 관장하는 수호신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인간신 가운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격화한 조상신이다. 이 신은 제사와 숭배를 받고 있는 한 수호신으로서의 기능을 다하지만, 그것을 게을리하면 디먼으로 변하여 재앙을 내린다. 그리하여 죽은 사람의 영혼을 달래는 의례를 행할 필요성이 생기는데, 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조상령의 단계를 거쳐서 신령의 높은 위치로 올라가는 과정에 신관념의 다채로운 전개를 볼 수 있다. 초월신은 현세를 초월하는 유일 절대신인데, 단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의 신을 가리킨다. 이 초월신 신앙은 신화적인 표상에 의하여 우주를 채색하는 자연신 신앙이나, 인간 영혼의 전변(轉變)에 의하여 세계를 해석하려고 하는 인간신 신앙과는 달리, 우주와 세계의 조화를 하나의 추상적인 원리에 의하여 설명하려고 하는 데 특징이 있다.

헤브라이즘의 신
일반적으로 고대 이스라엘 종교, 유대교, 그리스도교 및 이슬람교의 계보를 유일신교라고 하며 경전으로는 《구약성서》 《신약성서》 《코란》 등이 있다. 헤브라이즘 유일신의 특징은, 그리스사상에서 철학적·사변적 우주원리나 원시적 자연종교에서 공포의 대상과 다를 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환경세계를 이루는 고대 오리엔트 종교의 다신교에서 말하는 우주론적 지고신(至高神)과도 다르다. 절대타자의 역사에 대한 인격적 개입에 의해서 나타나는 종말론적 구제에서 볼 수 있는 신은, 자연순환의 신격화 또는 세상으로부터의 해탈에서 구제를 찾는 여러 종교의 신에 대한 관념과는 구별된다. 살아 있는 인격적·역사적인 신이며, 초월자이면서 특정의 인간집단과 계약관계에 들어가는 계약과 법의 신이라는 점은, 신의 이름을 계시한 <출애굽기(3:14)>에 나타나 있다. <스스로 있는 자>란 그리스적인 절대존재가 아니라 <함께 계시는> 신을 뜻한다. 다른 고대 오리엔트세계에서 신적 힘은 남녀배우신(男女配偶神)의 교접에 의한 풍요를 바탕으로 한 우주론적 질서를 나타내고 있으며, 따라서 현질서 유지를 지향하고 있는 데 반하여, 헤브라이즘에서는 신적 힘이 현상개혁의 힘으로서 가장 적절한 기회에 신의 기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신의 힘에서 신뢰를 구하며, 세계내적인 구제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의 법적 의지에 따르는 윤리적 합리성(베버)이 종교적 성격의 특징을 이룬다.

역사적 여러 형태
헤브라이즘의 신은 역사적으로는 모세시대에서 비롯되지만, 그 배경은 더 오랜 옛날이며, <창세기> 족장시대의 <족장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은 계절적 이동을 생활양식으로 하는 반유목민으로서, 특정의 토지와 결부되는 누멘(신적 존재)이 아니라 후대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리는 바와 같이, 씨족 조상의 인격과 결부된 누멘을 존중하였다. 모세종교는 하느님의 이름을 따라서 <여호아종교>라고도 하는데, 역사적으로는 남팔레스타인, 미디안지방의 샤스족이 숭배하였고, 이 유목민의 이동과 더불어 이집트로 들어갔으며, 신왕국시대의 신분 변동으로 하층노동자가 된 사람들이 다른 하층민들과 함께 모세의 초인적 지도에 의하여 기적적인 구출(출애굽)을 경험하고, 하느님의 산(시나이산)에서 이 역사적 구원의 하느님과 언약을 맺는다(시나이계약, <출애굽기> 19∼24장). 이리하여 특정한 <유일신>에게 배타적인 신뢰와 충성을 다하는 종교와, 이웃사람의 생명·인격·명예·재산 등 기본적 권리를 존중하는 윤리를 분리하여 통합하는 독특한 생활형태가 성립하였다(모세의 십계명). 근대 유럽세계의 윤리적 합리성의 원천은 여기에 있다. 황야에서 성립한 서약연합은 BC 12세기 이래 가나안에서 오리엔트적인 농경문화와 왕제(王制)라는 완전히 다른 정치형태와 접촉하였다. 그 결과로서, <엘종교>의 우주의 창조주·왕의 속성이, <족장신>이 인도하는 신의 그것과 함께 여호아의 속성에 흡수되어, 여호아는 우주자연과 역사의 지배자가 되었다. 또한 왕국기(王國期)에 출현한 현실의 세속세계를 간접통치하는 <섭리>의 신이 지식층에 의하여 조형되어, 세계사 속에서 감당해야 할 민족의 사명이 사상화되었다. 그리고 BC 8∼BC 6세기의 정치적·민족적 위기의 증대, 왕국 멸망에 이르는 움직임 속에서, 교조주의나 열광주의에 대립하여, 선지자들은 백성의 심판에 의한 신의 의(義)의 관철이라는 부정매개적 구원을 역설하였다.

 

유대교·그리스도교
BC 586년 유대가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바빌론에 유수된 뒤, 성전승(聖傳承)은 문서화·경전화되어서, <말씀>의 종교는 서적종교가 되었다. 특히 율법(토라)은 하느님의 계시라고 해석되었고, 개인적·주체적인 율법엄수에 의한 언약단체(교단)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에스라에 의해 율법주의가 성립한 결과로, 율법해석의 분열이 시작되어 복잡한 의론이 계속되었다. 예수는 <아버지>인 하느님과 하느님의 지배가 절박함을 가르쳤고, 다시 <가까이에 계시는> 하느님을 역설하였다. 초대교회는 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하여 하느님의 구원이 완전히 계시되었다고 하여, 예수를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아들(그리스도)의 대속(代贖)에 의한 새로운 언약단체(교회)를 형성하였다. 그 후의 교리신학은 헤브라이즘의 전통적 유일신과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을 거쳐서 삼위일체론을 형성하였다.

한국 민속신앙의 신
한국인은 여러 종류의 신을 믿어왔다. 농경이 큰 비중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대지모신(大地母神)이 특별히 신격화되었으며, 절대적인 존재로서 피안에 있는 신이 의인화된 인격신으로서 의식되는가 하면, 실존하였던 사람의 사후 영혼이 신격화되어 인격신으로 의식되기도 하였다. 또한 자연은 자연대로 마을은 마을대로 집안은 집안대로 <만신전>을 이루고 있었다. 산에는 산신 이외에 나무와 바위의 신령이 있고, 땅의 지신과 논밭의 용신도 있었다. 산신은 대체로 호랑이와 함께 있거나 호랑이의 화신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한국의 민속신앙은 무속신·마을신·가신(家神)을 3대 신으로 하고 있다. 무속신앙의 신들은 무당을 매개로 하여 특정한 시기가 없이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숭앙된다. 마을신은 남성들이 당주적 역할을 하며, 동신·당산신·서낭신 등이라 하고 무당과 당주를 거쳐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신명을 줌으로써 마을사람들은 간접적으로 신지핌을 경험한다. 이때 굿판이나 놀이판에 함께 어울려 마을사람은 누구나 신바람을 낸다. 마을신은 보호자로서의 권능을 지니고 있으나, 관련 금기가 어겨지고 부정이 저질러지면 오히려 저주와 재앙을 받게 된다고 믿는다. 또 마을신은 정해진 시기에 일시 집중적으로 신봉되며, 비교적 권능이 다양해서 전지전능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 신이다. 이에 비해 여성들에 의해 주도되는 가신은, 놀이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굿이라기보다는 축원이나 치성 등 주부가 혼자서 정적으로 행하는 기축행위가 주가 되며, 특정한 날에 각별하게 섬겨지면서도 1년 내내 모셔 받들어진다. 가신은 재산과 가문을 지키고 잡귀와 재앙을 막아내는 액막이 구실을 하는 권능이 있으나 철저하게 분업화된 전문적 직능의 신들로서, 집안에는 삼신·업주·터주·조왕·조상신 등이 모셔졌으며, 업주는 뱀 따위의 동물로 표상되었다. 마을굿이나 별신굿에서 섬기는 마을신이 한국인의 가장 큰 신이며, 마을신 가운데 수호신인 골막이신을 으뜸으로 본다. 신체(神體)는 돌·나무, 큰 짚신짝·목각 등으로 다양하게 표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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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절대자 신

오즈의마법사 - L.F. 봄의 오즈의마법사

오즈의마법사 - L.F. 봄의 오즈의마법사

 

 

오즈의 마법사 (-魔法師 The Wonderful W...)

L.F. 봄이 쓴 오즈이야기 제1편. 1900년에 간행되었다.

 

설명
L.F. 봄이 쓴 오즈이야기 제1편. 1900년에 간행되었다. 캔자스 초원에서 집과 함께 회오리바람에 흽쓸려 올라간 소녀 도로시와 강아지 토토를 중심으로 허수아비, 프리키 나무꾼, 마음 약한 사자가 여러 가지 사건을 경험하면서 이상한 나라 오즈에 사는 마법사를 방문해 마침내 원래의 캔자스로 돌아오기까지의 기상천외한 모험이야기이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하기 시작한 미국 독자적인 아동문학작품의 하나로, 미국적인 밝은 분위기에 이상한 등장인물과 사건이 신선한 매력이 되어, 아이들과 어른의 인기를 얻었다. 1902년 뮤지컬화에 성공한 이후 반복해서 영화로 상영되었다. 봄이 쓴 속편이 13권이며, 그의 아들을 포함해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 26편이다.

 

 

오즈의마법사 - L.F. 봄의 오즈의마법사

난타 - 송승환 난타

난타 - 송승환 난타

 

 

난타 (Cookin)

식당요리사들이 펼치는 에피소드와 사물놀이 장단을 결합한 넌버벌 타악 퍼포먼스.

 

설명
식당요리사들이 펼치는 에피소드와 사물놀이 장단을 결합한 넌버벌(비언어) 타악 퍼포먼스. 1997년 10월 송승환의 PMC프로덕션이 첫 공연하여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2002년 9월 현재 국내외에서 126만여 명 관람, 순이익 80억 원에 이르는 흥행을 기록했으며, 서울에 2개의 난타 전용관을 운영한다. 《난타》는 첫 공연 이래 한국의 대표적 문화상품으로 아시아와 유럽 곳곳을 돌았다. 1999년과 2000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에 거듭 참가하여 호평을 받았다. 2001년 9·11테러사건으로 중단되었던 미국 순회공연이 2002년 로스앤젤레스와 하와이 공연을 시작으로 다시 계속된다. 2003년 라스베이거스 무대에 진출하며, 일본·독일·러시아·이탈리아·호주·뉴질랜드에서도 공연한다. 또 2004년 3∼4월에는 뉴욕 브로드웨이의 뉴빅토리 극장에서 5주 동안 20만 달러 개런티를 받고 공연한다.

 

 

난타 - 송승환 난타

클레오파트라 -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 -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 (Cleopatra BC 69∼BC 3...)

 

클레오파트라 7세. .

 


설명
클레오파트라 7세(BC 51∼BC 30).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왕조 마지막 여왕이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의 왕가, 이어 시리아 설레우코스왕가에서 발견되고, 프톨레마이오스왕가에서도 여왕이름으로 종종 쓰였으나 클레오파트라 7세가 가장 유명하다.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둘째딸이었다. 재색을 겸비한 여성으로 높은 교양을 지녔고, 이집트어는 물론 여러 나라 말을 잘 구사하여 외교사절과도 통역 없이 대화하였다고 한다. 17세에 프톨레마이오스집안 관례에 따라 9세된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공동통치자가 되었으나, 곧 두 사람은 대립하여 궁정 안에서 두 파로 갈라져 싸웠으며 한때 클레오파트라쪽이 열세하여 시리아로 물러갔다. BC 48년 M.G.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에 들어온 J. 카이사르를 만나 지지를 받아냈다. 그 결과 일어난 알렉산드리아전쟁에서 카이사르는 처음에는 고전하였으나 마침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패배시켜 죽게 하였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 5살난 막내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이집트 공동통치자로 지정하였으나, 그녀는 사실상 카이사르의 애인이 되어 아들 카이사리온을 낳았다. 카이사르의 로마개선 뒤 클레오파트라는 어린 왕을 데리고 로마를 공식방문하여 카이사르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BC 44년 3월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급히 이집트로 돌아와 프톨레마이오스 14세를 죽이고, 카이사리온을 공동통치자로 내세웠다. BC 42년 G.J.C. 옥타비아누스와 힘을 합하여 카이사르를 암살한 무리를 격멸한 M. 안토니우스는 이듬해 소아시아 타르소스에서 클레오파트라와 회견하였는데, 그 미모와 재기에 사로잡혀 알렉산드리아로 함께 가 연인 사이가 되었다. BC 40년 안토니우스는 로마로 돌아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정략결혼하여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끝난 듯 보였으나, BC 37년 파르티아원정을 위해 동방에 온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애정을 되찾는 동시에 군사적 지원을 받았다. 그들 사이에는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다. BC 36년 파르티아원정은 참패로 끝났으나 클레오파트라는 페니키아까지 사랑을 구하여 달려갔다. BC 34년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승리하자 관례를 벗어나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시스여신으로 분장하여 주변 여러 나라를 속국으로 거느리고 동방 헬레니즘세계의 여왕으로 군림하였다. 이 소식은 곧 로마에 전해지고, BC 35∼BC 34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활발한 선전과 비난의 문서 싸움이 시작되어 정치문제로부터 여성관계 추문을 폭로하기에까지 이르렀다. BC 33년 안토니우스는 에페소스에 동방로마군단과 속국 군대를 집결시켰고, 클레오파트라도 군함과 군자금을 제공하였다. BC 32년 안토니우스는 드디어 옥타비아에게 이혼장을 보냈고, 옥타비아누스는 내란형식을 피하기 위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만 선전포고하였다. BC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서로 천하를 두고 겨루었으나 싸움중 클레오파트라가 함대를 이끌고 달아나고 안토니우스도 이를 뒤쫓아 싸움은 가볍게 끝났다. BC 3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가 자살, 클레오파트라도 로마개선식에 끌려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스로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등 로마의 대표적 장군 두 사람을 매혹시킨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인으로부터 <나일의 마녀>라는 악담을 들었으나 최후의 깨끗한 죽음은 높이 평가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코>로 알려진 B. 파스칼의 경구(警句), W.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및 그 영화화 등 헬레니즘 최후의 여왕에 대한 관심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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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

렌트 - 현대경제 렌트

렌트 - 현대경제 렌트

 

 

 

렌트 (rent)

생산요소 투입으로 얻는 총수익과 그 생산요소 공급가격 사이의 차액을 의미하는 현대경제학용어.

 

설명
생산요소 투입으로 얻는 총수익과 그 생산요소 공급가격 사이의 차액을 의미하는 현대경제학용어. 생산요소란 토지·노동·자본을 가리키며 공급가격이란 그 요소들을 사용하는 데 드는 최소비용을 말한다. 렌트의 정의는 18세기 사회의 소득분배에 대한 설명에서 최초로 언급되어, 고전경제학에서는 한정된 토지나 기타 천연자원을 소유하는 사람이 얻게 되는 수익에만 렌트라는 용어를 한정, 지대(地代)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했다. 현대경제학에서는 이를 확대시켜 어떤 형태의 생산요소라도 그것을 사용해서 얻는 수익과 그 요소의 실제 공급가격, 즉 비용간의 차액을 모두 렌트의 개념에 포함시킨다. 토지와 같이 고정성이 강한 내구적 자본설비의 임대료를 가리키는 준지대(準地代)를 이따금 렌트라고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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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트 - 현대경제 렌트

한여름밤의꿈 - 세익스피어 한여름밤의꿈

한여름밤의꿈 - 세익스피어 한여름밤의꿈

 

 

 

한여름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

영국 극작가 W. 셰익스피어가 1595년 무렵 창작한 5막 희극. .

 


설명
영국 극작가 W. 셰익스피어가 1595년 무렵 창작한 5막 희극. 귀족의 결혼축하용으로 쓴 것으로 짐작되며, 오월제와 하지제(夏至祭)에 관련된 민간전승에서 소재를 얻고 있다. 시슈스공작과 히포리타의 결혼식을 앞둔 아테네에서 마을 처녀 허미어는 애인 라이샌더와 함께 아버지가 정해준 약혼자 디미트리아스를 피해 숲으로 도피한다. 그녀를 찾아 디미트리아스가 숲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그의 옛 애인 헬레나가 뒤따른다. 한편 숲속에서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가 싸우고 있었는데, 요정 파크가 숲과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사랑의 묘약>을 잘못 써서 연애의 방향이 역전되는 등 웃지 못할 사건들이 일어난다. 결국 모든 오해는 풀어지고, 오베론과 티타니아는 화해하고 허미어와 라이샌더, 디미트리아스와 헬레나가 공작의 결혼식에서 함께 결혼식을 올리며 만사가 형통된다는 줄거리이다. 환상적·낭만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으며 청년기 셰익스피어를 대표하는 희극이다.

 

 

 

한여름밤의꿈 - 세익스피어 한여름밤의꿈

2010년 4월 28일 수요일

전쟁 - 가속화 되는 국가 간의 신경전, 전쟁의 위험

전쟁 - 가속화 되는 국가 간의 신경전, 전쟁의 위험

 

 

전쟁 (戰爭 war)군사력에 의한 국가 상호간 또는 국가와 교전단체간의 투쟁행위. .
설명
군사력에 의한 국가 상호간 또는 국가와 교전단체간의 투쟁행위.

총설
실질적인 의미로는 정치집단, 특히 주권국가 사이에서 군사력 행사를 중심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벌어지는 대규모의 전면적 투쟁상태이다. 프로이센의 전략가 K.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해서 수행되는 정치(정책)의 연장에 불과하다>라고 규정하였듯이 전쟁은 고도의 정치적 현상이며, 이런 점에서 전쟁과 다른 투쟁형태, 예컨대 외교, 경제적 압력, 선전, 간섭, 무력에 의한 위협, 소규모 무력행사 등과의 차이는 상대적이지만 전쟁이 보다 전면적이고 포괄적인 투쟁관계라는 점에서 구별된다. 한편 전쟁을 형식적·법적인 의미로 정의하면, 당사국에 의한 전쟁개시의 의사표시로부터 합의 또는 일방적 정복에 의한 전쟁 종결까지 계속되는 특수한 국제법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의 전쟁은 실질적인 무력행사가 없거나 무력행사를 전면적으로 종결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다. 실질적 의미의 전쟁과 형식적 의미에서의 전쟁은 지금까지는 대체로 일치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형식적 의미의 전쟁개념은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전쟁관념의 변천
A. 오리게네스와 Q. 테르툴리아누스로 대표되는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교도의 군사적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현실적으로 비전론(非戰論)은 성립될 수 없었으므로 정당한 전쟁, 즉 정전론(正戰論)이 대두하게 되었다. 정전론은 중세에 이르러 아우구스티누스·이시도로스·T. 아퀴나스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T. 아퀴나스는 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① 군주의 명령에 따라 수행할 것 ② 정당한 원인을 근거로 할 것 ③ 정당한 의도로 수행되어야 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신학적 정전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전쟁을 군주의 일방적인 행위로만 파악하고 양국간의 관계로 파악하려는 관점은 결여되어 있었다. 실제로 신학적 정전론은 군주에게 전쟁의 정신적·종교적 정당화를 위한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군주 자신이 전쟁범죄를 범했을 때에는 그것을 비호하는 청죄사적(聽罪師的)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근세 초기의 신학자·법학자는 물론, 18세기의 <국제법학 영웅시대>에 속하는 학자들 F. 비토리아·F. 수아레스·H. 그로티우스 등도 중세 정전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러나 정전론은 당시 유럽 국가간 전쟁으로 차츰 현실성을 잃게 되었다. 첫째, 교전국 상호간에는 전쟁수행을 위한 일정한 규칙(교전법규)이 있었지만 그 규칙은 정(正)·부정(不正)의 구별 없이 쌍방 교전국에게 무차별 적용되었다. 둘째, 교전국가와 제3국간의 관계에서는, 제3국 국민에 의한 대적통상(對敵通商)을 최대한 허용하는 중립법규가 성숙되어 있어서 중립의 유지를 위해서는 교전국 쌍방에 대한 공평성의 유지가 필수조건이었다. 따라서 전시국제법은 정전론과는 분리되었고 18세기에 들어와서는 C. 볼프·E. 바텔·W. 모제르 등 정전론의 현실 적응성을 의심하는 법학자가 잇달아 나타났으며, 19세기에는 전쟁원인에 관계 없이 전쟁을 허용하는 <무차별전쟁관>이 지배적인 견해가 되었다.

전쟁의 위법화
20세기에 들어 와서 <무차별전쟁관>은 국제조약에 의하여 동요하게 되었다. 국제연맹규약은 중대한 분쟁은 모두 연맹기관 또는 국제재판에 회부할 것을 의무화하고, 연맹기관의 권고나 국제재판소 판결에 승복하는 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금지시켰다. 1928년 64개국이 서명한 부전조약(不戰條約)은 분쟁해결을 위한 전쟁을 금지하고, 국가정책의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포기할 것을 선언하였다. 국제연합헌장은 가맹국 및 국제연합의 행동원칙으로서 국제관계에 있어서 국가의 영토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에 관한 상황이라 하여도 국제연합의 목적에 반(反)하는 무력에 의한 위협이나 무력행사는 삼가해야 한다고 전쟁의 위법성을 규정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힘에 의한 지배로 구축된 식민지체계나 인종차별체제에 대한 저항과 해방을 위한 전쟁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있다.

 

전쟁의 역사
전쟁은 당대의 국제사회 또는 국내사회의 정치적·사회적 구조를 반영하는 정치·사회현상이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 한다.

고대의 전쟁
사유재산의 발생과 노예제도가 생기면서 부를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이 인류사회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토지와 노예의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성립했던 고대 노예제사회에서는 도시국가간의 전쟁(펠로폰네소스전쟁), 대소국가간의 전쟁(포에니전쟁·페르시아전쟁), 이들을 정복·지배한 여러 제국간의 전쟁(로마와 페르시아, 페르시아와 흉노, 흉노와 진나라·한나라간의 전쟁)은 모두 노예소유계급이 토지·노예·공납의 획득을 위해서 벌인 정복과 약탈의 전쟁이었다.

중세의 전쟁
봉건제사회가 되자 토지를 매개로 하여 주종관계가 된 봉건영주와 기사(騎士)가 지배집단이 되고, 농민은 무장해제되어 농노가 되었다. 봉건영주 계층은 군주로부터 아래는 소영주에 이르기까지 위계질서를 형성하였고, 농노는 영주의 군사적 보호하에 봉건적인 공납부역을 맡았다. 봉건권력의 기초는 직령지(直領地)였기 때문에 국왕과 영주는 영지를 확장하고, 각종 수익원(收益源) 획득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지만 그 규모는 작았다. 주종관계를 정치의 기본 조직으로 하는 봉건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화폐교환경제의 발달 및 도시시민계급의 경제력 증대와 이들 세력과 결합한 국왕권력의 확대였다. 도시의 재정 지원은 국왕의 용병부대 대량사용을 가능하게 하였고, 그에 따라 전쟁은 초기의 약탈 위주의 소규모 전쟁에서 적의 격멸을 노리는 대규모 전쟁으로 변했다. 왕권의 확대·강화를 목표로 한 전쟁이 된 것이다(백년전쟁·장미전쟁).

근세의 전쟁
유럽에서는 봉건제에 이어 절대왕제가 성립하였다. 몰락해가는 봉건적 특권귀족과, 발전해가고 있던 지주적 상업 자본가의 균형 속에서 국왕은 중앙집권적 관료제도와 상비군을 기반으로 어느 계급에게도 제약을 받지 않는 절대권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국가들은 남북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에서의 식민지 획득과 경영 및 식민지무역에 대한 보호와 그 촉진에 힘썼다. 이로 인해 각국은 세계무역과 식민지 확보를 위한 전쟁을 계속하였고, 자국의 식민지무역을 보호하고 경쟁국의 무역활동을 봉쇄·제약하기 위해 재정부담이 큰 해군을 창설하게 되었다. 유럽대륙에서의 전쟁은 각국이 동맹관계 또는 적대관계를 맺고, 왕권의 권위와 영토확대, 또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수행되었다(에스파냐계승전쟁). 그러나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는 전쟁은 부의 원천이라고 여겨 무자비하게 전개되어 각국간의 식민지 및 식민지무역 쟁탈전으로 나타났으며, 무역 독점에 필요한 해역지배를 위한 해전이었다(영국·네덜란드전쟁).

프랑스혁명과 국민전쟁
시민혁명 이래의 전쟁은 프랑스혁명 이전의 봉건제후·절대군주의 전쟁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라서, 이 시기의 전쟁은 국가적 통일과 국민적(민족적) 독립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국민전쟁이었다. 이념적으로 프랑스혁명은 혁명프랑스의 방위와 봉건적전제에 시달리는 외국민중을 위한 해방전쟁이었으며, 영국과 결탁한 대륙의 구체제 세력과 프랑스 주도하에 신체제를 요구하는 대륙세력과의 전쟁형태를 취한, 이른바 국제적인 계급투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지배지·시장의 확대를 노린 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신흥 프랑스 자본주의의 정치·경제상의 침략적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연이은 나폴레옹전쟁은 유럽시장 확보를 목표로 하는 프랑스자본주의와 이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선진 영국자본주의 및 대륙의 구체제 보전세력과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국민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었던 국민국가·국민전쟁의 이념과 목표는 각국에서 독립국민국가가 실현되고, 자본가가 국가의 지배세력이 됨에 따라서 소멸되었다. 그 대신 국가지배가 강화되었고, 해외시장확대를 위해 후진국의 식민지·반식민지화(半植民地化)를 위한 식민지전쟁(아편전쟁)과 국가간의 식민지쟁탈전쟁(보어전쟁)이 격화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에 대응하여 국가권력 쟁탈을 목표로 하는 혁명과 내전(남북전쟁, 태평천국의 난), 민족독립을 위한 항쟁(세포이의 항쟁)과 독립전쟁이 줄이어 계속되었다.

제국주의와 세계전쟁
제국주의시대가 되면서 열강들에 의한 세계의 식민지 분할이 완료됨에 따라 직접적인 군사수단 이외에는 새로운 경제적 확대가 불가능해지자 식민지 재분할전쟁이 시작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은 이런 제국주의적 무력 팽창정책의 결과로 발생한 식민지 재분할과 세계지배를 둘러싼 전쟁이었다. 전쟁의 역사 속에서 제1차세계대전은 이제까지의 전쟁과는 달리 2가지 점에서 특기할 만한 성격을 지녔다. 첫째, 전쟁의 규모·내용·목적 등이 무제한적인 전면전의 성격을 띠었으며,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절대전쟁>적인 양상을 나타냈다.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규모, 국력의 총동원, 전쟁의 이데올로기화,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 등이 그 특징으로 나타났다. 둘째, 전쟁과 혁명의 결합이다. 이는 <제국주의전쟁을 내란으로>(레닌)라는 슬로건에 집약된 혁명전쟁으로의 전화(轉化), 즉 국제적인 유기적 결합에 바탕을 둔 혁명의 국제적 내전화(內戰化)의 출현을 말한다. 제1차세계대전은 국가간의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러시아혁명·독일혁명·헝가리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혁명적인 국제적 내전화로 종결되었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파리코뮌혁명을 유발시켰고, 러·일전쟁은 제1차러시아혁명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세계적인 제국주의전쟁은 제국주의·자본주의체재를 강화시키지 못하고, 반대로 자본주의적·사적 소유를 폐지한 사회주의체제 출현의 요인이 되어 제1차세계대전으로 소련이, 제2차세계대전으로 동유럽·아시아에서 10여 개가 넘는 국가가 혁명에 성공하였다. 그 중 중국·베트남은 피억압민족의 민족해방전쟁을 기본형태로 한 새로운 인민전쟁의 형태를 취하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통해 식민지들을 재분할·지배하고자 했던 제국주의국가들의 목표와는 달리,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식민지들은 세계대전으로 대부분 식민지배상태에서 벗어났다.

현대전쟁의 성격과 특징
제2차세계대전 후 핵시대의 개막과, 제3세계의 대두 및 이들의 국제적 규모의 정치참여와 공업화과정의 참가는, 북의 평화(전쟁이 없는 상황)와 남의 전쟁(정치·사회의 불안정을 바탕으로 권력의 정당성을 둘러싼 한 나라 안의 내전을 축으로 한 무력분쟁)의 다발상황(多發狀況)을 야기하였다. 이렇듯 현대는 절대전쟁을 현실화하는 핵전쟁의 위험과, 특정지역에 한정되긴 하지만 절대전쟁의 본질을 가진 내전의 빈발이라는 2종류의 절대전쟁 가능성을 내포한 시대이다.

정치목적 달성수단으로서의 유효성 감소
근대국가 성립 이전의 전쟁은 권력자, 이후에는 국가의 정치목적 달성의 결정적 수단이었다. 그러나 핵·미사일 등 무기의 발달로 인류의 종말까지 예측되는 사태에 이르자 전쟁은 문제(분쟁)해결의 결정적 수단이 되지 못하고, 국가의 존속유지마저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군사력 행사 대신 군사력의 위협적인 사용이 중요시되는 한편, 군사력 행사의 제약상황을 완화하기 위한 방책으로서 전쟁은 핵전쟁과 재래식전쟁, 세계전쟁과 국지전쟁, 전면전쟁과 제한전쟁, 특수전쟁(민족운동 대응)·저수준전쟁(테러 대응) 등으로 분류된다. 전쟁개념의 다양화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전쟁의 다양화만이 아니라 정치적 요인에 의해서도 진행되고 있다. 제3세계의 전쟁인 이스라엘과 아랍간의 전쟁(중동전쟁)에서 보듯이 전쟁은 더 이상 정치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은 되지 못한다.

군사와 외교의 일체화
전쟁승리전략에서 평시를 중요시하는 전쟁억지전략으로의 전환은, 군비의 거대화를 초래하는 동시에 군사전략과 대외정책의 구별을 불분명하게 하여 전략의 외교화, 외교의 전략화라는 식의 군사와 외교의 일체화를 촉진하였다. 그 좋은 예가 무력전쟁과 외교를 결합한 <단계적 억지전략>이다. 전쟁이 시작되어도 외교는 단절하지 않고 교섭을 계속하면서 싸운다거나, 국제여론을 감안하여 무력규모를 조절하는 등 종래의 전쟁과는 아주 다른 양상의 전쟁이 나타나고 있다. 이제는 선전포고 없는 전쟁, 승패도 결정하지 않은 채 휴전하는 전쟁이 일반적이다. 전략의 뜻도 전에는 좁은 뜻으로는 군사전략을, 넓은 뜻으로는 군사·정치·경제·심리·사상 등 모든 분야에 걸친 종합전략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별되었는데, 오늘날에는 넓은 뜻으로만 이해하게 되었다.

무력분쟁의 빈발과 성격 변화
핵무기의 발달과 신식민지주의, 제3세계의 독립과 공업화의 진전 등 제2차세계대전 후의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조건의 획기적 변화에 따라 무력분쟁의 무대와 당사자는 제3세계로 옮겨졌다. 분쟁의 쟁점도 영토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정당성 또는 체제문제로 바뀌어 무력분쟁은 종래의 전쟁과는 다른 성격의 전쟁이 되었다. 제2차세계대전후의 주요 무력분쟁 66건 중 베를린봉쇄와 헝가리사건·체코사건을 제외하면 모두 제3세계에서 일어났다. 그 내용을 보면 식민지독립전쟁 17%, 독립 후 정치권력을 둘러싼 내전 52%, 국가간의 분쟁이 29%이다. 더구나 내전은 물론 식민지독립전쟁, 국가간 분쟁에서도 분쟁의 쟁점은 종래의 영토문제가 아니라 주로 정치권력의 정당성 또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러한 무력분쟁의 구조변화는 종래의 영토를 쟁점으로 했던 전쟁의 강화(講和) 종결방식을 불가능하게 하였고, 일시적인 휴전은 있어도 분쟁 중에도 권력이 충분한 정당성을 인정받을 때까지 계속되고 있다. 식민지와 종속국 사회의 급속한 공업화는 전통적인 사회구조 변화에 따른 사회분쟁을 일으켰으며, 이것은 선진국의 경제적 원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중적 억압체제 아래 놓인 민중의 반란은 필연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3세계에서의 반란은 정치권력에 대한 반란인 동시에, 그 권력을 비호하는 선진국이나 선진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체제에 대한 반란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빈발하는 무력분쟁의 배경이다. 그러나 선진국의 무력 개입은 정치적·경제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3세계의 무력분쟁은 권력의 정당성을 쟁점으로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전쟁의 90% 이상은 이런 전쟁이며, 그 내적 요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계속될 전망이다.

전쟁피해의 급증
국제연합의 《세계사회정세보고(1985)》에 따르면, 1945∼1983년 사이의 주요무력분쟁은 103건이며 군인·민간인 사망자가 약 1636만 명이다. 무력분쟁은 소규모라 해도 그 성격의 차이와 높은 빈도 때문에 희생자와 난민이 급증하고 있다. 1951년에 설치된 국제연합난민고등판무관 사무소에 따르면, 설치된 이후 2600만 명의 난민을 해결했지만, 아프리카·아시아·중앙아메리카 및 그 밖의 지역에 1000만 명(1986) 이상의 난민이 있다고 한다. 민간인의 피해가 급증하고 있는 것도 그 특징 중의 하나로 제1차세계대전 때 군인이 전체 사망자수의 95%이고 민간인은 5%였으나,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군인 52%, 민간인 48%, 6·25전쟁 때에는 그 비율이 역전되어 16% 대 84%, 베트남전쟁은 5% 대 95%가 되었다. 핵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관해서는 많은 예상보고가 있는데, 핵전쟁에서는 승자가 따로 없으며, 전쟁 후의 사회적·경제적 복구를 위해서 오랜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지구의 환경이 크게 변하는 이른바 <핵겨울>의 도래를 경고하고 있다.

한국의 전쟁
고조선시대 이래 한민족은 외부세력으로부터 부단한 침략을 받아 왔고 그 때마다 침략세력과 치열한 전쟁을 치르며 민족의 동질성과 영토를 유지·지속시켜 왔다.

통일신라까지의 전쟁
BC 109년 고조선의 세력 확장이 한(漢)나라의 영토확장 정책을 방해하자 한나라는 군사 5만을 이끌고 고조선을 침공하였다. 고조선은 이에 대응, 선전하였으나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화전 양파가 대립하는 내분으로 멸망하였다. 삼국시대에는 중국 수(隋)나라의 양제(煬帝)가 고구려 원정을 결의하고 612년 고구려를 쳐들어왔다. 을지문덕장군은 수나라군대에 맞서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薩水)에서 이른바 <살수대첩>을 통해 결정적인 타격을 입혀 격퇴하였다. 그 뒤 수양제는 613, 614년, 617년 3차례나 침입하였으나 거듭 패하여 이 전쟁은 수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唐)나라도 고구려 침공 기미를 보이자 고구려는 백제와 동맹하여 당나라의 위협을 견제하는 한편,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신라는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전개, 양국의 동맹을 견제하였다. 644년 당나라 태종이 10여 만의 대군을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고구려군은 이를 막아냈다.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하여, 영토확장에 목적이 있는 당나라와 연합하고 660년(무열왕 7)과 668년(문무왕 8)에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여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가 한반도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여 영토확장 야욕을 드러내자 여러 차례에 걸친 당과의 전쟁을 통해 677년 한반도의 완전한 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전쟁
후삼국간의 대립·경쟁을 거쳐 재차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는 거란의 3차례에 걸친 침략행위를 각각 화의(和議;서희의 외교 담판), 강화, 강공(강감찬의 구주 대첩)으로 물리쳤다. 1104년(숙종 9) 만주의 여진족이 세력을 강화하여 함흥평야를 지배하기 위해 고려를 침입했었고, 고려는 1107년(예종 2) 윤관을 도원수로 삼아 17만의 병력을 파견, 여진의 점령지역에서 여진군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다(여진정벌). 1231∼1257년 몽고는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해왔으나 항몽세력의 핵심인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을 비롯한 40년간의 항쟁을 통해 한민족의 끈질긴 저항정신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의 전쟁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가 대륙 진출을 구실로 1592년 15만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여, 20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계속 북진, 평양·함경도까지 진출하였다. 관군이 왜군을 막지 못하자 국내 각 지방에서는 의병이 일어났고,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및 관군의 재정비, 명나라 군대의 진주와 전염병의 유행 등으로 왜군은 격퇴되었다. 1597년 14만 명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일본이 재침공해왔지만, 관군의 대비와 수군의 우세로 쉽게 물리쳤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조선은 전국이 전장화되고 왜군의 약탈과 살육으로 인하여 심한 타격을 받았고, 명나라는 병력 파견으로 인한 국력의 소모와 재정의 문란으로 청나라에 멸망당했으며, 일본에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덕천가강)]가 정권을 장악하는 등 전쟁 참여 국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1636년 중국에서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황제를 칭하는 태종이 원정군 10만을 편성, 지휘하여 조선을 침입함으로써 병자호란이 시작되었다. 청군은 조선국왕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조선의 국왕이 성문 밖에 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 인조는 부득이 성문을 열고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였는데 이것은 한국 역사상 큰 치욕이었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흥선대원군의 가톨릭 탄압에 대한 항의로 강화에 상륙한 병인양요와 1871년 미국이 통상을 요구하며 공격해 온 신미양요 등 서양 국가들과의 전쟁도 있었다.

항일독립운동
메이지유신 이래 자본주의적 발전을 가속화하여 제국주의 단계로 접어든 일제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를 기반으로 한반도 침략을 기도하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을 강요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해산시키자 해산된 군인들은 각지의 의병과 합류하여 일제에 무력항쟁을 계속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항일의병운동은 계속되었고, 범국민적인 항거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항일무력투쟁은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그 가운데에 <청산리전투>는 독립군의 혁혁한 승리를 안겨준 전투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 일제의 세력이 만주에까지 미치게 되자 독립군은 근거지를 잃고 상해임시정부에 가담, 1940년 한국광복군을 정식으로 창설하였다. 광복군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 미국과 제휴하여 본국 상륙작전을 준비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상륙작전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한민국 수립 후의 전쟁
1945년 광복은 이루었지만, 또다시 외세에 의해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북한에 성립된 김일성정권은 스탈린의 비호 아래 1950년 6월 25일 조국해방전쟁이란 구실로 남한을 침공하였다. 국방군은 빈약한 무기로 맞서 싸웠으나 병력과 장비의 열세로 7월 말에는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하였다. 9월 15일 유엔군 및 한국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서울을 재탈환하고, 평양·원산·청진·신의주 부근까지 북진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은 약 30만의 군대를 편성, 개입함으로써 전쟁의 성격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간의 국제적 체제대립·투쟁이라는 성격을 띠게 되었고, 그로 인해 냉전체제는 더욱 강화·지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가운데 소련의 요청에 따라 1951년 휴전회담이 개시되고 1953년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6·25로 인한 인명피해는 막대하여 유엔군과 한국군이 18만 명, 북한군이 52만 명, 중공군이 90만 명, 한국의 민간인 99만 명이 사상당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1965년, 월남의 지원요청에 따라 전투부대를 파견함으로써 한국은 베트남전쟁에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 7년 5개월 동안 파월된 한국군 부대는 총병력 4만 8000명이며, 그 중 4800여 명의 희생이 있었다. 한국은 월남파병을 통해 자본주의세계의 집단안보체제에 동참함으로써 미군의 계속 주둔, 한국방위보장의 확보 등 국방력이 강화되었고, 제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추진 등 한국경제 부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90년 8월에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촉발된 걸프사태가 전쟁으로 확대되자 한국도 걸프군비지원 및 주변국 경제지원분담금으로 2억 2000만 달러와 항공기·선박 등을 다국적군에게 제공하였고 또한 군 의료진도 파견하였다.

 

 

전쟁 - 가속화 되는 국가 간의 신경전, 전쟁의 위험

이라크 - 서아시아의 전쟁국가 이라크

이라크 - 서아시아의 전쟁국가 이라크

 

 

이라크 (Republic of Iraq)

서아시아에 위치한 나라. .
설명
서아시아에 위치한 나라. 정식명칭은 이라크공화국(al-Jumhūrīyah al-'Irāqīyah)이다. 면적 43만 7072㎢. 인구 2537만 4000명(2004). 북쪽은 터키, 동쪽은 이란, 서쪽은 시리아와 요르단, 남쪽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 인접해 있으며 남부 일부가 페르시아만에 면해 있다. 수도는 바그다드.

이라크의 자연
이라크는 크게 3지역으로 나뉜다. 국토의 중앙부를 흐르는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 북쪽에서 북동쪽을 경계 짓는 쿠르디스탄지방의 산악지역, 그리고 서부·남서부를 차지하는 시리아·아라비아대지(臺地)의 사막지대이다. 그 중에서도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평원은 이라크 총면적의 82%를 차지하며 이라크의 자연환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지역은 티그리스강 연안의 사마라와 유프라테스강 연안의 히트를 잇는 선으로 상류지역과 하류지역으로 나뉜다. 상류지역은 해발고도 500m 정도의 기복이 심한 자지라구릉으로 되어 있으며 유출구가 없는 수많은 와디(Wadi)로 된 소분지(小盆地)를 이루고 있다. 하류지역은 충적평야로서 이라크 관개농업의 중심지대이고,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합류한 샤트알아랍수로(水路) 연안은 갈대가 무성한 소택지(沼澤地)를 이룬다.

쿠르디스탄산지는 이란·터키국경에 인접해 있으며 이란의 자그로스산맥에 이어지는 가파르고 험한 습곡산맥으로서 해발고도 3000m가 넘는 높은 산도 있다.

티그리스강의 본류나 그 지류인 대(大)자브강·소(小)자브강이 관류하는 평원 일대가 고대 아시리아 땅이었다. 이라크의 서부와 남서부를 차지하는 사막지대는 유프라테스강 하류의 저지에서 차츰 높아져서 해발고도 1000m에 이르는 고원을 이루고 있다.

북부는 시리아사막의 연장이며, 남부의 하자라사막은 사우디아라비아 네푸드사막의 북쪽 경계선을 이룬다. 사막지대에는 메소포타미아평원 쪽으로 많은 와디가 형성되어 있는데, 가장 큰 하우란와디(Wadi)는 전체길이가 480㎞에 이른다.

기후는 저지에서는 5~10월의 건조하고 무더운 여름과 12~3월의 비교적 따뜻하고 습기가 많은 겨울의 두 계절이 있는데 산지의 겨울은 매우 춥다. 바그다드의 7월평균기온은 34℃이고 한낮에는 그늘에서도 43℃나 되는데, 주민들은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낮에는 지하실에서 보낸다. 특히 1921년 7월 8일 바스라에서 관측된 58.8℃는 세계 최고의 기록이다.

강수량은 쿠르디스탄산지에서는 연간 400㎜를 넘지만, 남서부쪽으로 갈수록 차츰 감소되어 바그다드에서는 150㎜ 전후에 지나지 않는다. 사막지대는 한층 더 건조하여 농경이 불가능한 불모지이다. 그러나 티그리스강·유프라테스강을 비롯한 크고 작은 지류는 쿠르디스탄산지, 터키의 산지, 그리고 고원의 강수 등이 모여 흐르는데 유수량은 풍부하다.

이라크의 역사
메소포타미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BC 3000년 무렵 수메르는 자신들의 문자(文字)를 가진 독자적인 문화를 구축하였다. 이어서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바빌로니아왕국과 신(新)바빌로니아왕국이, 티그리스강 상류에는 아시리아왕국이 일어나 번영하였다.

그러나 BC 539년 이란의 아케메네스왕조페르시아가 정복한 이후 이라크는 알렉산드로스대왕, 파르티아왕, 사산왕조페르시아 등 외부세력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다.

7세기 중엽 이슬람교가 아라비아반도에서 일어났는데,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교도단은 이라크를 지배하고 있던 사산왕조의 군대를 물리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초기 옴미아드왕조시대에 이슬람제국의 중심은 시리아에 있었으나, 749년부터 아바스왕조시대가 시작되면서 수도는 이라크의 알쿠파·바그다드에 설치되어 당(唐)나라의 장안(長安),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번영을 누렸다.

그 뒤 아바스왕조는 차츰 세력을 잃었고, 이란·중앙아시아·이집트·북아프리카에 계속해서 독립정권이 생겨나자 경제적 주도권도 이집트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1258년 아바스왕조는 몽골에게 멸망당했으며 바그다드는 황폐화되었다. 더욱이 14세기 말에 티무르가 이끄는 몽골군이 공격해 들어와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는 관개시설을 파괴하였다.

1534년부터 제1차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약 400년 동안 이라크는 오스만 투르크의 속주(屬州)로서 지배를 받게 되어 여러 차례 터키군과 사파비왕조의 이란군이 싸우는 전쟁터가 되기도 했다.

한편 제1차세계대전 때에는 터키가 독일·오스트리아측에 참전하였는데, 영국군과 인도군이 바스라 부근에 상륙하여 1918년 터키를 제압하고 이라크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이 무렵 이라크 내에서는 민족운동이 고조되어 많은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1920년 산레모회의에서 이라크의 위임통치권을 승인받은 영국은 1921년 메카의 하심가(家) 출신인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맞아들여서 위임통치를 실시하였다. 파이살국왕은 그 뒤 여러 차례 영국과의 조약을 개정하면서 독립으로 나아갔으며, 1932년에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독립을 성취하였다.

제2차세계대전과 전쟁 뒤의 혼란이 석유이윤으로 인해 경제가 윤택해지기 시작한 1953년에, 젊은 파이살 2세가 즉위하였다. 국왕의 지지 아래 누리 아사이드가 총리로서 독재적인 지도력으로 정국도 안정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58년 7월 카셈 준장이 이끄는 군사쿠데타로 국왕·황태자와 많은 왕족과 총리 등이 살해되고 공화국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라크의 정치
1958년 쿠데타로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꾼 이라크의 카셈정권은 바그다드조약(뒤의 중앙조약기구, 약칭 CENTO)에서 탈퇴하고 중립주의정책과 친(親)소련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뒤 국내에서는 군부의 반란, 공산당 세력의 증대, 쿠르드족의 반란, 대외적으로는 이란과의 샤트알아랍수로의 영유권문제, 쿠웨이트합병 등을 둘러싸고 지도층에서 대립이 생겨 정치정세의 불안이 계속되다가 1963년 2월 바스당(黨) 장교단이 일으킨 쿠데타로 카셈정권은 붕괴되었다.

새 정권의 아리프대통령은 얼마 뒤 군부와 협력하여 바스당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 결과 친이집트파가 대두하여 단일정당인 <아랍사회주의자연합>을 설립하고 주요기업의 국유화 등 일련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내세웠다. 여러 차례의 정변 뒤 1968년 7월, 온건파인 바크르장군 등이 일으킨 쿠데타로 바스당정권이 성립되었고, 바크르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 1970년 9월에 잠정헌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바스당 내의 내분은 격렬했으며 쿠데타 시도는 계속되었다. 한편, 1972년 소련과의 우호협력조약에 조인함으로써 미국의 세력 아래 있는 이란과의 대립을 일으켰다.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전부터 계획했던 이라크석유회사(IPC)의 국유화를 단행했으나 대폭적인 원유생산량의 감소는 국민경제를 압박하였다. 그러나 한편 서방측 거대 석유자본과의 분쟁은 국내여론의 통일과 민심을 결속시켰으며 바크르정권을 안정시켰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계기로 이란의 팔레비국왕과 국교를 회복하고, 1975년 두 나라 사이의 국경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따라 이란은 이라크 내에서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무장봉기한 쿠르드족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는데 동시에 이라크 정부군은 쿠르드족에게 총공세를 가하여, 15년 동안 계속되었던 쿠르드족의 해방투쟁을 일단 진압하였다.

중동 여러 나라 가운데서도 가장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온 이라크와 소련 관계는 1978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악화되었다. 그 원인은 대외정책의 차이, 소련 일변도에서의 탈피 등이었으며 그 밖에 이라크 내 쿠르드족에 대한 소련의 지원도 이라크정부를 자극하였다.

1978년 이집트-이스라엘평화협정, 1979년 이란혁명 등 격변하는 중동정세 속에서 1979년 7월, 11년 동안의 장기집권 끝에 바크르대통령이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고 후임으로 실권을 쥐고 있던 S.T. 후세인 혁명지도평의회부의장이 취임하였다.

이라크는 1980년 9월, 혁명 뒤의 혼란 속에 있는 이란에 대하여 전(前)국왕과의 협정파기를 선언하고, 이어서 이라크기(機)로 이란 영내를 침공하여 이란-이라크전쟁을 일으켰다. 단기전을 노렸던 후세인대통령의 의도와는 달리 시아파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군은 사기가 높아 전쟁은 장기화되었다.

1982년 이란은 점령당했던 도시를 탈환하였으며, 6월에는 이라크의 일방적 정전·철수로 전쟁은 종결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전쟁 뒤 배상을 둘러싼 분쟁은 계속되었다. 이란군이 이라크를 역침공한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자, 급진적인 회교혁명의 확산을 원치 않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와 회교 소수민족문제를 안고 있는 소련·사우디아라비아 등 온건아랍국가들이 이라크를 원조하였다.

그리고 리비아·북한과 같은 급진적이며 교조적인 국가는 이란을 원조함으로써 전쟁은 장기소모전으로 변모했다. 1987년 7월 이 지역의 원유수송의 안전을 이유로 미국이 직접 개입하고 이라크가 이란에 대해 화학무기를 무차별 사용하자, 이란은 1988년 7월 국제연합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598조를 수락한다고 발표하여 8년간에 걸친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8년 전쟁의 직접 원인이 되었던 샤트알아랍수로의 영유권문제는 해결되지 못함으로써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았다. 이라크에 의해 시작된 전쟁이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채 끝나고 그 뒤 국내 정세의 불안과 경제난이 계속되자 이라크정권은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1990년 8월 2일 전격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점령하였다. 이에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는 같은 날, 이라크군의 무조건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라크가 이를 거부하자 같은 해 8월 5일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에 특전단을 파견하였다. UN에서는 11월 29일, 이라크군이 철수에 응하지 않을 때는 다국적군으로 하여금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결의했다. 이라크가 철수시한인 1991년 1월 15일을 넘기자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은 같은 해 1월 17일 공격을 감행하여 <걸프전쟁>이 일어났다.

일방적인 다국적군의 공격에 불리해진 이라크는 같은 해 2월 18일, 소련이 제시한 타협안을 수락함으로써 2월 28일 미국은 종전을 선언하였다. 걸프전 이후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는 대량살상무기(WMD)와 장거리 미사일 폐기, 국제연합의 무기 사찰을 받아들일 것을 결의하였으며, 이 결의를 받아들일 것을 이라크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라크는 안전보장이사회의 요구를 거절하였으며, 그 뒤 12년 동안 갈등관계를 이어왔다.

2001년 9월 미국테러참사(9·11테러)가 일어난 뒤 2002년 1월 미국은 북한·이란과 함께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규정하였다. 2003년 3월 20일 미국은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하여 자국민 보호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대외명분을 앞세워 영국·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이라크를 공격함으로써 <이라크전쟁>이 일어났다. 미·영연합군은 3주 만에 바그다드를 함락시켰으며, 같은 해 5월 1일 미국 대통령 G.W. 부시는 종전을 선언했다.

그러나 종전 이후에도 이라크 내 저항세력의 연합군과 미군에 대한 공격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민간인 희생자까지 나오는 등 이라크 전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2003년 12월 마침내 후세인이 체포됨으로써 전후 이라크 상황 전개는 전환기를 맞이했다.

2004년 6월 미 군정과 과도통치위원회는 이라크 과도정부에 권한을 이양하였다. 과도정부 대통령은 가지알 야와르, 총리는 이야드 알라위가 취임하였다. 2005년 1월, 총선을 실시하여 시아파 정당 연합체인 유나이티드이라크연맹(UIA)이 47.6%를 얻어 최다 득표했으며, 주요 쿠르드 정당 2개로 이루어진 쿠르드연맹리스트(KAL)가 각각 25.4%와 13.6%를 득표했다. 총선에서 승리한 시아파와 쿠르드족이 차기 정부 구성을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이라크의 경제·산업
이라크는 1958년의 공화제혁명 이래 기본적으로는 사회주의화를 추진하면서도 경제분야에서는 정경분리(政經分離)에 따라 서방측 나라들과 협력을 추진하였다. 이라크의 경제는 석유와 농업 두 분야에 의존하고 있는데 재정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석유가 압도적으로 많아 85%에 이른다. 원유의 연간 생산량은 1997년에 2억 1467만 8000배럴, 2001년에 8억 5322만 5000배럴을 기록하였다.

한편, 취업인구면에서 보면 농업부문이 30% 이상의 비율을 차지한다. 1972~1975년에 걸쳐서 IPC(영국·미국·네덜란드·프랑스 자본) 및 그 관련회사를 국유화한 정부는 적극적인 석유정책을 폈는데, 새로운 유전탐사 및 개발과 키르쿠크·아인자라하·주바이르 등 주요 유전의 확장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개발노력의 결과 1975년 당시 240만 배럴(1일 생산)에 불과했던 산유량은 1979년 전반에 330만 배럴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란-이라크전쟁과 1990년 쿠웨이트 침공에 따른 다국적군의 폭격으로 석유 적출시설이 파괴되고, 시리아를 경유하는 파이프라인이 폐쇄됨으로써 산업의 생산기반이 완전히 파괴되는 결과를 빚었다. 더욱이 쿠웨이트 침공에 대한 UN의 경제봉쇄로 원유수출마저 제재를 받게되어 더욱 어려운 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국토면적의 절반 이상이 불모지이며 경지면적은 17%에 불과하므로 농업부문은 상당히 부진하다. 더구나 천수경작(天水耕作)이 가능한 토지는 연강수량이 400㎜가 넘는 북부의 산악지대뿐이다. 주요한 농업지대인 메소포타미아평원은 관개에 의존하고 있으며 참밀·보리 등을 재배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벼를, 북부의 산지에서는 과일·담배를 재배하고 있다. 예전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대추야자 생산국이었으나 점차 생산량이 격감하고 있으며, 걸프전쟁 이후 계속된 흉작으로 식량부족사태까지 겪었다.

토지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1958년부터는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집단농장화·기계화를 추진, 댐건설·관개시설 정비·새 농지 개척·품종개량 등 농업부문의 투자를 늘리기도 하였다.

제조업은 식품가공·직물·연와제조·제혁(製革) 등의 전통산업과 더불어 시멘트·석유정제·석유화학·철강·기계 등 근대공업이 있다. 석유파동 이후 1970년대 중엽 뒤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공업화에 힘을 기울인 결과 석유정제공업은 매우 높은 신장률을 보였고 식품공업·비금속건재공업 등도 빠른 성장을 보여왔다.

또한 여러 차례에 걸쳐 5개년계획이 수립되었으나 계속된 쿠데타로 중단되거나 지연되는 경우가 많았고, 대체로 공업의 현대화는 종래의 수출전용 계획에서 농업관련산업과 소비재산업으로 전환하여 농촌소득을 향상시킴과 동시에 노동자들을 양성, 공업화 기반을 충실하게 하는 데에 있었다.

무역은 전체 수출의 98%를 차지하는 원유와 석유제품이 두드러진다. 주요수출 대상국으로는 요르단·이탈리아·프랑스·브라질·터키, 주요 수입품은 기계류·수송기계·곡물류·철강·섬유제품, 수입상대국은 독일·미국·프랑스·영국·이탈리아·일본 등이었으나, 걸프전쟁 이후 수출과 수입에 UN의 제재를 받게 되면서 수입상대국도 요르단·터키·헝가리·스위스 등으로 변화되었다.

2003년 3월 20일 발발한 이라크 전쟁으로 인하여 난민들의 대규모 약탈과 미군의 폭격으로 많은 건물과 시설들이 크게 파괴되었다. 이라크는 걸프전에서 입은 피해가 회복되기도 전에 나라의 주요 시설이 다시 파괴되어 빈사상태가 되었다.

각 금융기관들은 재원부족과 민간투자 유치의 어려움으로 이라크 경제개건에는 오랜 시일이 걸릴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이라크 경제가 직면한 가강 큰 문제는 대량 실업사태로, 총인구의 절반이 실업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003년 9월, 석유를 제외한 이라크의 모든 경제 부문에 외국인 지분 투자를 100% 허용하는 획기적인 경제계획안을 발표하는 한편 10월 사담 다나르와 스위스 다나르를 폐지하고 새로운 화폐 <이라크 다나르>를 발행했다. 또한 12월에는 독일·프랑스·미국은 이라크 경제복구의 걸림돌인 1200억 달러에 달하는 대외부채를 경감하기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2004년 6월 이라크 과도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신경제정책이 부상하는 가운데 과거 국가 주도의 중앙계획에서 벗어나 새 자유경쟁시장 체제로 전환할 것을 모색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앞으로 4년간 360억 달러의 재건자금이 필요하다고 예상하였다. 2004년 2월, 세계은행은 이라크 재건프로그램에 본격 착수하였다. 재건 기술지원에 500~1000만 달러가 소요 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이라크의 사회
주민은 많은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아랍인이 전체의 6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소수민족 가운데서는 쿠르드인이 가장 많으며 총인구의 23%를 차지한다. 북서쪽 쿠르디스탄지방에 주로 거주하고 있는데, 이란·터키·시리아에 걸친 페르시아계 주민이다. 민족도 언어도 아랍인과는 다르고 자치권을 요구하며 오랫동안 중앙정부와 대립해 왔다. 이 밖에 북이라크의 터키인, 중앙부의 이란인을 비롯하여 아시리아인·아르메니아인·야지디인·사바크인·사바인·유대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언어는 공용어인 아랍어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 한편 북부에서는 쿠르드어와 터키어가 일반적이며 동부 부족 사이에서는 페르시아어의 방언도 쓰이고 있다.

종교도 이라크주민을 나누는 중요한 요소이다. 총인구의 95% 이상이 이슬람교도인데 정통파인 수니파와 분파(分派)인 시아파로 양분된다. 수니파는 바그다드와 바스라시민을 비롯한 아랍인과 쿠르드인, 시아파는 그 성지(聖地) 카르발라 주변의 아랍인과 이란인이다. 그리스도교도는 네스토리우스파·그레고리우스파·그리스정교·아르메니아정교 등 각파를 합하여 20만 명 이상이 있다고 짐작된다. 그 밖에 약간의 유대교도도 있다.

수도인 바그다드와 바스라·모술 등 3대도시를 비롯한 각 도시는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다. 한편, 농촌지역의 가옥은 햇볕에 말린 흑벽돌을 쌓아올린 것으로서 전기·수도도 없이 사는 것이 보통인데, 오락은 노천다방에 모여 커피 등을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는 정도이므로, 이런 단조로운 생활을 깨기 위해 이슬람교의 제례나 결혼식 등은 성대히 거행된다.

교육은 6~12세의 초등교육이 의무교육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중등교육까지 3년간 연장하는 것이 검토되고 있다. 또한 1974~1975년, 초등학교로부터 대학교까지의 교육 전과정에서의 무료화 및 공립화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걸프전에 이어 이라크 전쟁까지 연거푸 겪은 이라크로서는 그러한 이상적 교육정책의 실천은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라크의 문화
고대문명이 번영했던 이라크는 유적과 옛 건축물이 많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에는 우르·에리두·우루크 등의 고대 수메르유적이 있고, 바그다드 남쪽에는 바빌로니아·신바빌로니아의 수도로 영화를 자랑했던 바빌론의 유적도 있다. 이러한 유적의 출토품들은 바그다드의 이라크박물관에 전시하였다. 바빌로니아제국 뒤에 일어난 아시리아제국의 무대는 티그리스강 상류인 북부 이라크였다. 그 대표적인 유적은 북부의 중심지 모술 근교의 니네베와 니르루드, 그리고 남쪽 약 60㎞ 지점에 있는 아수르의 성벽과 궁전터이다. 아시리아제국이 붕괴된 뒤 이주해 온 베두인족에 의해 만들어진 하트라거리의 유적은 아수르의 남쪽에 있다.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겨울 수도 쿠테시폰은 바그다드 남동쪽 약 30㎞ 지점에 있으며, 고대유적 중 최대의 아치를 가진 왕궁터가 남아 있다.

신바빌로니아제국이 멸망한 이래 이란에게 문화의 중심을 빼앗긴 메소포타미아는 8세기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는 아바스왕조 문화가 꽃피었다. 바그다드와 그 북쪽 120㎞ 지점의 사마라에는 왕궁터·모스크 및 모스크의 뾰족탑과 나선상뾰족탑 등이 있다. 이러한 고대문화의 유적은 정부의 고고문화국 관할 아래 있으며 발굴·조사·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슬람교 시아파의 시조 알리와 그 아들 후세인의 묘소가 있는 나자프와 카르발라의 모스크는 단순한 유적에 그치지 않고 지금도 성지로 여겨 신도들의 두터운 신앙을 결집하고 있으며, 이란·파키스탄으로부터도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2003년 3월 27일 일어난 이라크 전쟁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인 귀중한 유물과 유적들이 전쟁의 참화를 크게 입었으며, 또한 대량으로 도난당했다.

이라크와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 이라크는 1981년 서울과 바그다드에 총영사관을 상호 설치하기로 함으로써 정치·문화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1982년 뉴스교환협정, 1985년 항공협정 및 문화협정을 체결하는 한편, 이라크 기술훈련생들이 한국에서 연수기회를 갖는 등 교류가 활발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1989년 상호수교로 이어져 같은 해 7월, 두 나라는 대사관을 설치하였다. 경제분야에서의 협력은 한국이 수교전인 1977년 3월부터 이라크에 진출한 이래 1987년까지 11개 업체가 71건의 공사를 수주하여 한국의 해외건설시장에서 3번째로 큰 대상국으로 성장하였다. 이에 따라 건설인력 진출도 활발하여 1982년 2만 명, 1988년 약 6000명을 기록하였다.

1991년 걸프전쟁이 터지면서 주이라크대사관을 잠정적으로 폐쇄하였다. 2000년 2월 이라크시장 개척을 위해 한국 민·관경제대표단을 파견하였다. 통상면에서는 2003년 대한수입 5730만 달러, 대한수출 4억 281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1999년 10월에는 바그다드에 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무역관을 재개한 데 이어 2000년 2월에는 이라크와의 경제협력 재개를 위해 민관경제 대표팀을 파견한 바 있다.

이라크전쟁으로 한국은 미국 부시 대통령의 요청에 의해 2003년 5월 이라크 남부 나시리아 지역에 건설공병부대인 서희부대 573명과 의료지원단으로 이루어진 제마부대 100명을 파견하였다. 2004년 8월에는 이라크 북부 아르빌 지역에 전투병과 재건지원병으로 구성된 3000명의 자이툰부대를 추가로 파병하였다.

한편, 북한과는 1968년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이란과의 전쟁발발 뒤 북한이 이란을 지원함으로써 1980년 10월 단교하였다. 1992년 5월 북한과의 외교관계 복원에 원칙적 합의했으며, 제3국 주재 양국 공관을 통해 국제무대에서 협력관계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북한과의 통상은 1986년 대북한수입 600만 달러, 대북한수출 160만 달러를 기록하였다.

 

 

이라크 - 서아시아의 전쟁국가 이라크

시리아 - 서아시아 국가 시리아

시리아 - 서아시아 국가 시리아

 

 

시리아 (Syrian Arab Republic)

아시아에 있는 나라. .
설명
아시아에 있는 나라. 정식명칭은 시리아아랍공화국(Al-Jumhūrīya al-'Arabīya as-Sūrīya). 면적 18만 5180㎢. 인구 1758만 5540명(2003). 북쪽은 터키, 동쪽에서 남쪽으로 걸쳐 이라크·요르단·이스라엘, 서쪽은 지중해와 레바논에 접한다.

시리아라는 이름은 예로부터 동부지중해 연안 북부를 가리키는 명칭이며 그 범위는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의 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과 터키의 일부에 걸쳐 있었다. 이러한 나라들은 지리적·역사적으로도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어 시리아에는 이 지역의 나라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연방국가를 만들겠다는 <대시리아 구상>이 있다. 수도는 다마스쿠스.

시리아의 자연
국토의 대부분이 동쪽으로 완만하게 기울어지며 아라비아반도까지 이어지는 해발고도 200~1000m의 고원대지가 자리잡고 있다. 동부지방은 대부분이 사막이며 수목 없는 대초원으로 구성된 건조한 고원이다. 터키에서 발원하는 서아시아 최대의 유프라테스강이 북동부를 가로지르며 이라크 메소포타미아평원으로 흐른다.

남부 일대는 광대한 시리아사막을 이루고 있다. 다마스쿠스에서 팔미라 쪽으로 3줄기의 낮은 산맥이 뻗어 있으며 유프라테스강 쪽으로 이어져 있다. 남단부에는 드루스산(1801m)이 있다. 지중해에 이르는 서부와 레바논 국경 산악지대 남서부는 지형적·기후적으로도 동부 시리아대지와 두드러진 대조를 이룬다.

해발고도 1000m급 안사리야산맥이 지중해 연안과 나란히 뻗으며 연안에 좁고 긴 해안평야를 만들고 내륙부는 오론테스강으로 관개되는 비옥한 계곡지대를 만들어 시리아 최대의 곡창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남서부에는 레바논과 국경을 이루는 해발고도 2000~2500m급 안티레바논산맥이 있으며 그 동쪽 기슭을 흐르는 바라다강 연변에 있는 수도 다마스쿠스는 전형적인 오아시스도시이다. 안티레바논산맥 남부에 있는 독립봉 헤르몬산(2814m)은 시리아의 최고봉이며 그 남쪽이 이스라엘과의 국경 골란고원이다.

기후는 서부가 지중해성 기후이며 동부는 내륙성 사막기후이다. 해안 평야지대와 서부 산지는 여름은 덥고 겨울에는 온난한 습윤기후이다. 연강수량도 760~1270㎜로 풍부하여 산맥에는 삼림이 무성하다.

내륙은 대륙성 기후로 여름은 매우 덥고 겨울은 춥다. 11~3월이 우기인데 비가 오기도 하고 눈도 날리며 일교차도 심하다. 연강수량은 알레포에서 다마스쿠스에 이르는 지대는 600㎜, 내륙지대는 300㎜, 남동부 사막지대는 150㎜ 이하이다.

시리아의 역사
시리아는 북쪽 터키고원과 남쪽 아라비아반도의 접촉지대이고 지중해에 면해 있어 동 서간 교통요충인 서아시아의 십자로이다. 그러므로 여러 민족이 이 땅에 와서 다채로운 역사를 만들어냈다. 시리아의 역사는 BC 3000년 무렵 셈족계 아모리인·가나안인이 이 땅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를 구축했으며 알파벳을 발명했고 지중해를 무대로 국제무역에 종사했으나 BC 16세기에 이집트와 히타이트에 정복당했다.

BC 11~BC 10세기에 동쪽에서 셈족계 아랍인과 헤브라이인이 들어와서 왕국을 만들었으나 BC 8세기 중엽 아시리아의 침략으로 멸망한 뒤 신 바빌로니아,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 알 렉산드로스대왕 등 지배자가 어지럽게 바뀌었다.

알렉산드로스대왕이 죽은 뒤 BC 300년에 부장(部將) 셀레우코스가 시리아 북부 오론테스강 하류 지역에 안티오키아를 세우고 이곳을 도읍으로 하는 셀레우코스왕조 시리아왕국을 세웠다. 전성기에는 인도 서쪽의 서아시아 전역에 걸쳐 군림하여 아시아에 대한 헬레니즘문화 보급에 이바지했으나 BC 63년부터 로마제국, 4세기 무렵부터 비잔틴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7세기 무렵 이슬람교를 받드는 아랍인이 서아시아 일대를 제압하여 이슬람제국을 세웠다. 다마스쿠스는 우마이야왕조시대에 수도가 되었으며, 아바스왕조시대에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긴 뒤에도 상업문화도시로서 번영했다. 13세기 무렵부터 서쪽에서 십자군, 동쪽으로부터 몽골군의 침략을 받았다.

16세기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 되어 약 400년에 걸친 지배를 받았다. 19세기 말 아랍독립운동의 기운이 높아져 제1차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군과 협력하여 터키세력을 몰아냈으나 전쟁 뒤 프랑스군이 진주(進駐)하여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이에 대한 격렬한 저항운동이 있었지만 프랑스 통치는 제2차세계대전 뒤까지 이어졌으며 1946년 4월에 독립을 달성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시리아의 정치
독립 뒤 정치적 상황이 불안정하여 요인 암살·쿠데타가 자주 일어났다. 1955년 바그다드조약에 따른 공산주의 봉쇄나 1956년의 수에즈전쟁 등 국제정세가 시리아를 친이집트 반서방노선으로 바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아랍부홍사회당(바스당)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1958년에 이집트와 합병하여 아랍연합공화국을 만들었다. 그러나 합병 뒤의 운영은 원활하지 못했으며 1961년 쿠데타로 아랍연합에서 탈퇴하여 다시 단독 공화국이 되었다. 1963년 바스당이 정권을 잡았으나 재연합을 이루지 못했고, 그 뒤에도 쿠데타와 바스당 내 분열항쟁이 꼬리를 이었으며, 1967년 제3차중동전쟁에서 남부 골란고원을 이스라엘에 빼앗기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1970년 쿠데타로 아사드 현정권이 들어서 오랜 세월에 걸친 내분에 종지부를 찍었다. 1973년에 항구헌법이 제정되었고 소련의 원조로 유프라테스댐 제1기공사를 완성하는 등 경제정책도 순조로웠으며 내정적으로 안정되고 대외적으로도 그 지위를 높였다.

그러나 1973년 이스라엘과 제4차중동전쟁에 들어갔고 1975년 레바논내전에도 개입하는 등 인접한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이들 전쟁에 대한 화평교섭이나 수습공작을 둘러싸고 여러 나라와 새로운 대립·화합이 생겼다.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캠프데이비드협정 뒤에 이집트가 아랍전선에서 이탈한 데 대항하였고, 아랍진영 강경파로서 반이집트의 선두에 서서 친소경향을 강화했다. 시리아 현대사에서 최장기 집권(30년)을 기록한 아사드정권은 이슬람교 소수파인 알라위파가 차지하여 1979년부터 이에 대항하는 다수파인 수니파의 반항이 무슬림동포단의 테러활동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이에 대해 철저한 탄압과 대규모 괴멸작전에 나섰다. 1980년 가을까지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였으나 그 뒤에도 산발적인 폭탄사건이나 폭동이 일어났다. 외교면에서도 이집트-이스라엘평화조약, 이란-이라크전쟁에 기인하는 아랍진영의 분열은 시리아에 고립이라는 큰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정체(政體)는 헌법에서 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국가라 규정하여 사회주의경제에 의한 국가건설을 지향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으나, 헌법에서 대통령은 이슬람교도로 규정하고 있다. 원수는 1971년 이래 하피즈 알 아사드 대통령(2000년 6월 아사드 대통령 사망, 그의 아들이 대통령직 승계)이고 의회는 단원제 인민의회(정수 250)이다.

정당은 1972년 이래 바스당을 중심으로 4당이 결집한 민족진보전선이 있으나 사실상 바스당의 일당지배에 놓여 있다. 외교는 아랍민족주의·반제국주의·비동맹외교가 외교의 3대 지주이다. 아랍권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강경파였으나 구소련의 붕괴와 걸프전쟁 등으로 인해 유연한 태도로 돌아섰다. 2002년 미국의 중동정책에 실망하여 미국의 이라크 공격을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국방비는 10억 달러(2002)이고 30개월의 병역의무가 있다. 육군 21만 5000명, 해군 6000명, 공군 4만 명이다(2002).

시리아의 경제·산업
1963년 이래 사회주의체제를 채용하여 농지개혁·기업국유화 등 제도개편이 계속되어 경제성장은 두드러지게 둔화하였다. 그러나 1970년 아사드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온건한 현실노선으로 수정하여 외국자본의 유입, 각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 증대에 노력하고 있다.

근래 석유를 중심으로 하는 광공업으로 비중을 옮기고 있으나 농업은 여전히 기간산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강수량도 많으며 국토의 65%가 경작 가능하지만 실제 경작지는 그 반 정도인 551만㏊이며, 관개지는 그 10%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리아 농업은 기후 특히 천연의 강수량에 크게 좌우되는 약점이 있었으나 유프라테스댐이 완성되어 64만㏊의 관개지와 80만㎾의 전력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주요농산물은 밀·보리·면화·콩·사탕무 등이다. 지중해 연안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올리브·포도·토마토·수박·멜론 등 과일과 야채류 재배가 성하다. 목축도 양·염소를 중심으로 내륙고원 일대에서 사육되며 양모·양피·치즈·닭고기 등 축산물이 농업생산의 35%를 차지한다.

시리아의 석유는 1959년 북동쪽 티그리스강 연변에서 발견되어 1968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산유량은 해마다 증가하여 2001년에 연간생산량 18억 8000만 배럴을 넘었다. 현재 자원보호를 위해 14억 3100만 배럴로 유지하고 있다. 산유량이 많지는 않으나 다른 중동산유국이 페르시아만에 집중되어 있는 데 반해 지중해에 접해 있는 유일한 산유국으로서 중요성을 갖는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는 가맹하고 있지 않았으나 1972년 이래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에는 가맹하고 있다.

석유 이외에는 인광석이 채굴되어 수출되고 있다. 공업에 대한 투자도 적극적이며 식품·담배·직물·시멘트 등 공업생산이 급증하고 있다. 석유정제부문은 홈스제유소(연간 8억 2680만 배럴)에 이어 1978년에 바니야제유소(연간 9억 5400만 배럴)가 완성되어 석유제품의 국내수요를 충당하고 있다.

경제개발은 1961년부터 시작되었다. 공업개발에 중점을 두었던 제4차계획 달성률이 50% 이하로 끝난 데 대한 반성과 인구 급증으로 식량자급률이 떨어지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제5차계획(1981~1985)에서는 농업부문이 가장 중요시되었다.

무역의 기본구조는 근래 그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석유·석유제품 외에 면화·섬유제품·농산물 등을 수출하고 공업제품과 소비재를 수입하는 형태이다. 산유국이기는 하나 수출량이 적어 무역적자를 벗어나지 못하여 페르시아만 여러 나라로 나가 벌어들이는 한편 아랍산유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와 이라크의 송유관 통과료 등으로 적자를 메워 왔다.

그러나 레바논내전에 대한 장기적 개입으로 인한 군사비의 증대, 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의 삭감, 송유관 통과료 수입의 두절 등으로 제5차계획도 어려움을 겪었다.

철도는 오스만제국령시대에 건설되었는데, 레바논에서 연장되어 남다마스쿠스를 거쳐 요르단에 이르는 것과 홈스·알레포를 경유하여 터키·이라크로 이어지는 국제철도가 있다. 이들은 홈스-알레포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경에 의해 분단되어 국내교통망으로서의 기능은 제대로 갖출 수 없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댐 계획의 일환으로 지중해 연안 항구 라타키아에서 알레포를 경유하여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내륙을 횡단하여 터키 국경의 카미슐리에 이르는 새로운 중심노선을 건설중이다.

자동차 교통은 활발하며 다마스쿠스에는 국제버스와 국제합승택시도 있다. 해운은 지중해에 접한 라타키아·바니야스·타르투스 등 3항구가 있는데 라타키아가 최대의 무역항이며 송유관이 닿는 바니야스항은 석유의 적출항이다. 다마스쿠스에는 국제공항이 있다. .

시리아의 사회·문화
주민의 대부분은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인이지만 이 밖에도 여러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터키 국경지대 쿠르드인과 다마스쿠스·알레포의 아르메니아인, 그 밖에 유대인·아시리아인·터키인도 있다. 사막이나 스텝에서 유목생활을 하는 아랍인은 베두인이라 한다. 외국인으로는 1948·1967년 중동전쟁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 25만 명, 레바논내전 때 들어온 난민도 100만에 가깝다.

종교는 주민의 85%가 이슬람교도이지만 여러 종파로 나누어져 지역이나 부족에 결부하여 분포하고 있어 정치적으로도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다. 수니파는 도시에, 알라위파는 라타키아지방, 이즈마일파는 하마주, 드루즈파는 수와이다지방에 많다. 소수파인 알라위파나 드루즈파가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특히 알라위파는 정계·군부 안에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교도를 제외한 나머지 15%는 그리스도교도로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다. 이 밖에 소수이지만 유대교도도 살고 있다.

교육은 6년간 무상 의무교육제도이다. 중동의 여러 나라 가운데 학교교육 보급이 앞서 있는 편이다. 대학은 다마스쿠스대학·알레포대학 및 라타키아의 티슈린대학과 홈스에 석유전문학교가 있다.

신문은 전국지에 바스당 기관지 《바스》 《티슈린》 《아사우라》가 있고, 《알레포》 《홈스》 등 지방지도 발행되고 있으며, 영자신문 《시리아 타임스》도 있다. 방송은 국영인 라디오·텔레비전국이 독점하며, 아랍어 외에 프랑스어·영어·터키어 방송이 있다. 통신도 시리아국영통신(SANA)이 독점하고 있다.

시리아는 과거의 역사 가운데 여러 민족과 여러 문화가 뒤섞여 들어왔기 때문에 많은 유적과 건조물이 남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로마제국에 멸망당한 사막의 상업중계도시 팔미라인데 구경만 하는데도 이틀이 걸리는 규모가 큰 유적이다.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는 이슬람 건축 최대의 걸작이다. 8세기 전반에 세워진 이 사원은 19세기 말의 화재로 대부분의 장식이 소실되었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의 독창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알레포나 라타키아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에는 12세기 비잔틴제국과 십자군이 구축한 성채가 많이 남아 있다. 지중해 연안 타르투스 해안은 여름 보양지로 유명하다.

시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북한 단독수교국이다. 북한과는 1966년 7월 수교하였다. 한국과는 미수교 상태이나 1998년 11월 다마스쿠스 고위급 회담에서 경제협력방안을 논의한 바 있다. 2003년 대한수입액 2억 7386만 달러, 대한수출액 225만 달러이다. 2003년 교민 1명, 체류자 18명이다.

 

 

시리아 - 서아시아 국가 시리아

소행성 - 충돌의 위험 미소천체 소행성

소행성 - 충돌의 위험 미소천체 소행성

 

 

 

소행성 (小行星 asteroid)

태양계에 속하는 무수한 미소천체. .
설명
태양계에 속하는 무수한 미소천체(微小天體). 대부분의 소행성 궤도는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다. 유사한 미소천체로서는 혜성이 있는데, 혜성은 외관적인 윤곽이 명확하지 않은 점, 태양에 가까워질 때 주로 수증기와 먼지로 된 꼬리가 생긴다는 점, 궤도반지름·이심률·궤도경사의 값이 크다는 점으로 구별된다. 소행성은 단단한 암석덩어리이고 햇빛을 반사하며, 기체를 동반하는 경향은 전혀 없다. 대부분의 소행성의 모양은 암석의 부서진 조각처럼 불규칙하므로, 자전에 의해 지구를 향하는 쪽의 면적이 달라지고 밝기도 주기적으로 변화한다. 변광의 진폭은 뚜렷하여 1.7등급에 미치고, 변광의 주기는 3∼9시간 정도인 것이 많다. 이처럼 소행성의 모양이 불규칙한 것은 소행성이 원천체(原天體)의 파괴에 의해 탄생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소행성은 크기가 작고 어두운 것이 많기 때문에 제1호가 발견된 것은 1801년이 되어서였다. 발견자는 이탈리아 팔레르모천문대의 G. 피아치이다. K.F. 가우스는 이 관측 데이터를 이용하여 궤도를 결정하였는데, 그 결과에 의하면 궤도는 태양에서 2.77AU(천문단위)의 거리에 있게 되고, 이것은 <보데의 법칙>에 의해 화성과 목성 사이에 존재한다고 예상되었던 행성의 위치(2.8AU)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 뒤에도 비슷한 위치에서 소행성이 계속 발견된 사실로 미루어 옛날 이 궤도에 있던 보통 크기의 행성이 어떠한 원인에 의해 파괴되고, 또 그 뒤의 상호 충돌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소행성대가 생긴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한번 탄생한 행성이 파괴되는 메커니즘을 상상하기 어렵고, 지금까지 발견된 소행성의 전 질량을 합해도 지구 질량의 0.0002배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태양계가 생겼을 때 이미 10∼20개 또는 그 이상의 소천체로 탄생되어 그중 몇 개는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고 나머지는 충돌에 의해 파괴되어 무수한 소행성대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동일한 모행성(母行星)에서 탄생한 소행성은 지금은 다른 궤도상을 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고유이심률·고유경사를 계산해 보면 거의 비슷한 값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기원이 같은 소행성의 모임을 족(族)이라 부른다. 이 소행성의 족이라는 개념은 1918년 일본의 천문학자 히라야마 기요쓰구[平山淸次(평산청차)]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으며, 당시는 족의 수가 5개(테미스족·에오스족·코로니스족·아리아족·플로라족)였고 여기에 속하는 소행성의 수도 적었으나, 최근 D. 브라우어 등이 컴퓨터를 이용하여 연구한 결과 24족이 더 발견되었다. 소행성을 긴 반지름 순서로 늘어놓으면 화성과 목성의 궤도 사이의 공간을 균일하게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곳에 집단을 만들어 모이거나 또 어느 곳에는 공극(空隙)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공극은 토성의 고리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커크우드의 틈>이라고 한다. 공극을 이루는 위치에서는 소행성의 주기가 목성 공전주기의 1/2, 1/3 등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목성의 섭동(攝動)에 의한 영향이라 여겨지고 있다.

군(群)은 공극의 역현상인데 목성과 주기가 같은 군을 트로이군, 2/3의 주기를 갖는 것은 힐다군, 3/4의 주기를 갖는 것은 툴레군이라 한다. 소행성은 충분한 수가 확실히 관측되고 신뢰할 수 있는 궤도요소가 결정되면 일련번호와 명칭이 주어진다. 명칭을 붙일 권리는 보통 발견자에게 주어진다. 소행성의 등록이나 궤도요소의 관리는 오랫동안 미국의 신시내티천문대에서 담당하고 있었으나, 최근에는 스미스소니언천문대로 이전하였다. 태양계가 생겼을 때부터 있었다고 여겨지는 1번 세레스에서 4번 베스타까지는 비교적 크고 공모양을 이루고 있다〔표 1〕. 큰 망원경을 이용하여 소행성을 계통적으로 천구 전체에 걸쳐 관측하면 그 수는 거의 무한하게 증가한다. 그런 의미에서 소행성의 구분을 그 지름에 따라, 지름이 몇㎞ 이상인 것은 소행성, 그보다 작은 것은 운석 또는 태양계간물질이라고 정의한다는 것은 곤란하고, 〔표 1〕 과 같이 1000㎞라는 엄청난 크기부터 1㎛ 이하의 우주진(宇宙塵)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소행성의 크기와 그 수에 대해서는 〔표 2〕 에 나타난 것같이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소행성은 수가 많기 때문에 흥미로운 특수한 성질을 가지고 있고 이것들을 특이소행성이라고 한다.

 

 

소행성 - 충돌의 위험 미소천체 소행성

두바이 - 아름다운 나라 두바이

두바이 - 아름다운 나라 두바이

 

 

두바이 (Dubay)

아랍에미리트의 한 토후국. .
설명
아라비아반도 동쪽 페르시아만 남쪽연안에 있는 아랍에미리트 7개 토후국중의 하나이다. 영어로는 Dubai라고 표기한다. 면적 3900㎢. 인구 91만 3000(2000).

아랍에미리트 토후국 중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영토는 2번째로 크다. 행정중심지 두바이시에는 길이 12㎞의 운하가 있으며, 예전에 진주채취선으로 번영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페르시아만 내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두바이에서도 석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두바이의 석유이권은 1936년 영국계 이라크석유회사에 주어졌으나,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계 두바이석유회사(DPC)로 옮겨갔다.

 

1966년 바다에서 유전을 발견해 1969년부터 생산이 시작되었으며, 1975년 두바이정부가 DPC의 전면 국유화를 단행했다. 두바이는 연간 약 28만 배럴을 생산하여 아랍에미리트 7개 토후국 중에서 제2위 산유량을 자랑한다.

석유자원과 더불어 두바이경제의 기둥은 무역과 금융업이다. 두바이는 국제무역항으로 아랍에미리트 대부분의 은행과 보험회사들이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다. 물류 집결지로서 두바이 공항은 지역 내에서 가장 활발한 공항이며, 바다에서는 라시드 항, 두바이 건독 그리고 세계 최대 수준의 주벨리알리 항이 유명하다.

또한 관광에도 힘을 기울여 호텔, 골프장, 오락시설 등을 건설하고 있다. 특히 자유무역지역이라는 온갖 투자우대조치를 취하고 있어서 많은 외국기업들이 진출해 있다. 라스알하이마에서 아부다비까지 포장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두바이 - 아름다운 나라 두바이

일본화산폭발 - 위험한 섬나라 일본화산폭발

일본화산폭발 -  위험한 섬나라 일본화산폭발

 

 

화산 (火山 volcano)

땅속 깊이 있는 마그마와 가스가 지각의 약한 부분을 터뜨려 지상으로 분출하는 장소와 그 분출된 퇴적물로 형성되는 산체. .
설명
땅속 깊이 있는 마그마와 가스가 지각의 약한 부분을 터뜨려 지상으로 분출하는 장소와 그 분출된 퇴적물로 형성되는 산체(山體). 어떤 지점에서 활동 유무에 따라 활화산(活火山)·휴화산(休火山)·사화산(死火山)으로 구별하는데, 마르·쇄설화산·용암원정구·성층화산·순상화산·용암대지 등이 있다. 마그마는 물리적·화학적 성질이 다양하므로 분화양식이나 화산형태가 다채로우며, 지형상 산모양을 이루지 않고 와지(窪地)를 이루는 수도 있다. 분화는 여러 자연현상 중에서 가장 무서우면서도 아름다우며 한없는 공포감과 경이감을 일으킨다. 분화의 기록은 그리스시대인 BC 693년 이탈리아 에트나화산 분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 나라의 신화나 전설에도 화산활동이 등장하지만 과학적으로 화산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약 2세기 전부터이다. 과거 1세기 동안 화산학은 급속히 진보하여 화산에 대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차츰 고쳐왔다. 현재는 화산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여 그 혜택을 활용하고 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만 아니라, 지구 내부의 모습을 탐색하고 화성암이 생기는 과정이나 지진이 일어나는 과정 등을 구명하는 <지구의 창>으로서도 화산은 더욱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화산활동과 분화
지구 내부 마그마의 생성·이동·분출에 수반되는 여러 현상을 말한다. 좁은 의미의 화산작용은 분화활동이며, 넓은 의미의 화산작용은 분화·분기(噴氣) 활동을 비롯하여 화산성 진동, 지각변동, 지구자기(地球磁氣)·중력의 변화, 온천작용, 변질작용, 광화(鑛化)작용 등을 포함한다.

마그마의 생성과 상승
반지름 약 6400㎞의 지구 내부에서의 마그마 생성이나 상승메커니즘 등은 아직 잘 밝혀져 있지 않아 여러 설이 있다. 마그마는 지하 약 2900∼5000㎞ 정도를 차지하는 액체상 외핵(外核)에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는 고체인 지각 하부∼맨틀 상부(지하 수십㎞∼수백㎞)에서 온도와 압력의 균형이 깨어져, 국소적으로 녹아 생기는 듯하다. 맨틀은 상부가 1000℃ 정도, 하부는 수천℃ 되는 고온이면서 상부에서 1만atm 정도, 하부에서는 백 수십 만 atm의 고압하에 있으므로 고체상태를 이루고 있지만, 어디에서 온도가 오르거나, 압력이 내려가면 국소적으로 액화될 것이고, 수증기압이 올라가면 녹는점이 내려가므로 지하 깊은 곳에 물이 공급되어 마그마가 생기기 쉽다. 마그마는 서서히 집합하여, 주위의 고체보다 밀도가 작으므로 부력으로 갈라진 틈을 따라 또는 틈을 만들면서 차츰 상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맨틀 상부에서 생성된 초생(初生) 마그마 자체가 상승하는 것도 아니고, 용융상태가 위쪽으로 이동한다는 설도 있다. 즉 맨틀 상부가 주머니 모양으로 녹으면, 그 위쪽에 있는 고체물질 부분도 녹고, 또 그것이 괸 부분 안에서 대류가 생겨 하부에는 마그마에서 정출(晶出)된 결정이 가라앉는다. 결정이 생길 때의 잠열(潛熱)로, 그 괸 부분의 내부는 가열된다. 이와 같은 일이 되풀이되면 마그마 주머니(용융 부분)는 차례로 위쪽으로 이동할 것이다. 지구상의 대다수의 화산은 판구조론(板構造論;판은 두께 100㎞ 정도의 판상 암반) 가설에 의하면, 해양판이 생성되는 해저 융기부와 그것이 대륙판 밑으로 비스듬히 밀려들어가는 지대에 분포한다. 앞의 것에서는 맨틀을 구성하고 있던 고온물질이 맨틀대류로 상승하고, 가해지는 압력이 줄기 때문에 액화하여 마그마가 생기며, 뒤의 것에서는 판끼리 서로 밀고 밀리기 때문에 암석이 파괴되어 지진이 일어나고, 마찰열 등으로 암석이 녹아서 마그마가 생긴다는 것이다. 대서양 중앙해령은 앞의 것, 일본열도는 뒤의 것의 예이다. 또 하와이제도의 화산열(火山列) 등은 일정한 위치에 있고, 이동하는 판의 두께보다도 깊은 지하 수백 ㎞ 되는 곳에 있는 거대한 마그마의 근원인 열점(熱點)에서 간헐적으로 화산작용이 되풀이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분화(마그마의 분출)
많은 화산의 개개 분화는 마그마 본원의 마그마굄(magma chamber)이 아니라, 지각 윗부분의 얕은 곳에 생긴 2차적 마그마굄에서 시발되는 것 같다. 그 꼭대기가 지하 10㎞ 정도 되는 곳에 있음이 과학적으로 확인된 화산도 많다. 마그마의 상승이 도중에서 일단 정체하는 이유로는 주위 암석과의 밀도의 균형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얕은 굄에서는 마그마가 주위의 암석에 열을 빼앗겨 온도가 서서히 내려가고 그 속에 갖가지 광물의 결정이 생기게 되지만, 기체는 그 결정들 속에 함유되기 어려우므로 잔액에 녹아 있는 기체의 함량은 점점 증대한다. 그 기체의 압력이 주위 암석의 압력과 같아지면 끓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 마그마에서 유리한 기체는 갑자기 팽창하고, 그 압력이 급격히 증대하여 마침내 위의 암석을 단숨에 날려보내고 화산폭발을 개시한다. 일단 통로가 트이면 마그마는 한층 더 발포를 일으키며 나머지 마그마가 속속 세차게 분출한다. 분화의 메커니즘은 대략 이와 같으며, 분화는 2차적인 마그마굄을 전선기지(前線基地)로 삼아 반복되는 것 같다. 분화 때의 출구를 분화구(噴火口)라 하고, 분화구까지의 지하 통로를 화도(火道)라 한다. 분화구 안에는 화공(火孔)이라는 주활동부가 흔히 있으며, 평소에도 적열(赤熱) 용암이 노출되어 있거나 화산기체가 타고 있는 수가 있다. 또 분화할 때에는 거기에서 분출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분화구 안이나 산허리 등에는 수증기나 그 밖의 화산기체를 분출하고 있는 곳이 흔히 있다. 고형물이 없이 기체만을 내는 경우는 분화라고 하지 않고 분기(噴氣)라고 한다. 화산의 분연(噴煙)은 화산기체만이 있는 경우(주로 흰색)와 화산재 등의 쇄설물이 섞여 있는 경우(회색·검은색 등)가 있다. 보통의 분화와 달리 지하의 마그마로부터 수증기나 지하수가 가열되어 생긴 수증기가 차츰 축적되어 압력이 높아지고, 마침내 주위의 암석을 폭파하는 현상을 수증기폭발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분화의 일종으로 간주된다.

 

화산의 활동성과 수명
화산에서는 분출물의 퇴적으로 성장과 풍화·침식에 의한 파괴가 서로 힘을 겨루고 있다. 보통의 분화가 활발히 반복되고 있는 동안에 산체는 성장을 계속한다. 화산이 노쇠하면 분화는 잘 일어나지 않고, 풍화·침식 쪽이 우세해지므로 수증기폭발이 많아져 파괴작용이 심하며, 전혀 분화하지 않으면 산체는 더욱 더 급속히 개석된다. 화산은 최근에도 분화하고 있는 활화산, 분화기록은 있지만 근년에는 분화하지 않는 휴화산, 분화기록이 전혀 없는 사화산이 있으나 이 분류법에는 모순이 많다. 우선 활화산과 휴화산은 연수(年數)가 학자에 따라 서로 다르며, 휴화산과 사화산의 구별은 명확한 듯하지만 역사시대의 길이는 화산에 따라 다르다. 화산의 수명에 비하면 역사시대의 길이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사화산이 갑자기 분화하는 경우도 많다. 그 예로는 미국의 세인트 헬렌스 화산의 대분화 등이 있다. 활화산에는 종래의 분류에 의한 활화산·휴화산 전부 및 사화산의 약간이 포함된다. 즉, 활화산이란 앞으로도 분화할 우려가 있는 화산이다. 최근에 지질조사(다른 화산의 분출물과의 관련도 포함), 방사성원소의 붕괴를 이용한 화산분출물의 연대측정(화산분출물의 열로 수목이 타서 생긴 숯의 방사성 탄소 C-14 연대측정법 등), 화산 부근의 고고학적 조사(인류의 유적이나 유물 등이 화산분출물에 끼여 있는 경우), 오래 전의 기록의 발견이나 재검토 등의 진전으로 세계의 여러 화산의 유사 이전(有史以前)의 활동사도 급속히 밝혀지고 있다. 그리고 세계 최대급인 하와이의 순상(楯狀)화산은 100만 년간 성장을 계속하고 있는데, 산체의 성장이 멎고 침식이 차츰 탁월해진 뒤에도 일어나는 소분화까지 포함하면 화산의 수명은 300∼500만 년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넓은뜻의 활화산의 세계 총수는 약 850개이며, 해마다 50∼60개 가량의 화산의 분화가 보고되고 있다.

화산분출물
화산기체·용암·화산쇄설물로 나뉜다. 화산기체는 지하의 마그마에 포함된 휘발성이며, 평소에도 분화구나 분기공, 온천 용출공(湧出孔) 등에서 서서히 방출되는 경우가 많다. 기체의 압력은 분화의 원동력이며, 때로는 화산재를 성층권까지 뿜어올리고, 산체를 날려버리기도 한다. 수증기가 전체의 90∼99%를 차지하는 수가 많다. 용암은 지표나 그 가까이에서 휘발성 성분의 대부분을 방출한 뒤 마그마의 나머지이다. 굳어진 용암은 화산암으로서 화학조성·광물조성은 천차만별이지만, 현무암·안산암·석영안산암·유문암(流紋岩)으로 나뉜다. 폭발형 분화로 파쇄·분출된 새용암이나 기존의 암석토사의 크고 작은 파편을 화산쇄설물이라 한다. 또한 그것들이 지표에 떨어져 퇴적한 다음 서로 접착되어 생긴 암석을 화산쇄설암(퇴적암의 일종)이라 한다. 화산쇄설물은 크기·모양 등으로 분류되는데, 보통 지름 4㎜ 이하를 화산재, 4∼32㎜를 화산력, 32㎜ 이상을 화산암괴라 한다.

 

분화형식과 규모


분화 형식
분화는 마그마의 발포 현상이며, 그 양상은 마그마의 성질과 관계가 깊어 주로 그 점성의 크고 작음에 좌우된다. 일반적으로 산성이고 비교적 저온의 점성이 강한 용암을 분출하는 분화일수록 폭발적이며, 염기성이고 비교적 고온점성이 적은 용암을 분출하는 분화일수록 온화하다.

하와이식 분화
주로 용암을 유출하는 비교적 온화한 분화형식이다. 유동성이 큰 현무암질 용암이 분출하며, 개개의 폭발은 작지만 거의 연속적으로 몇 시간에서 몇 개월 동안 되풀이되는 것이 특징이다.

스트롬볼리식 분화
현무암질과 안산암질의 중간암질인 용암을 분출하며, 용암의 분출과 중소규모의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서 용암에 피각이 생길 사이가 없는 분화이다.

불카노식 분화
안산암질 용암을 분출하는 격렬한 폭발형으로, 분연의 높이가 산꼭대기 위로 1만m 이상 되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용암류도 생기는데, 상당한 두께를 이루어 흐르기 때문에 흐름이 느려 멀리까지 도달하기 어렵다.

초불카노식 분화
화산 활동이 일시 중단하였다가 화도에 머물러 있던 물질을 불어 올리는 형식으로 후에 용암이 유출되는 형태의 분화이다.

화산쇄설류
화산쇄설물이 수평 또는 산허리 방향으로 세차게 분출되는 현상으로, 유문암·석영안산암·안산암질의 극히 점성이 강한 용암을 분출하는 분화에서 일어나기 쉽다. 초속 수십m, 때로는 초속 100m의 고속으로 산기슭을 덮치므로 매우 위험하다. 고온의 크고 작은 새 용암 조각이 화산기체를 분출하여 화산기체와 함께 소용돌이치면서 산허리로 쏟아져 내리는 것을 열운(熱雲)이라 한다.

화산이류
다량의 수분을 함유한 화산회사(火山灰沙) 등이 초속 수십m의 고속으로 산기슭으로 흘러 내리는 현상이다. 이류(泥流)는 적설기나 우기에는 더 일어나기 쉽다. 화구호(火口湖)에서 분화하는 화산에서는 특히 경계해야 하며, 산허리에 퇴적한 화산회사가 큰 비로 흘러내려 2차적인 일을 생기게 하는 경우도 많다. 또 화산쇄설류가 하천으로 유입되어 이류로 변하는 수도 있다. 화산이류에는 수증기 폭발 등에 의한 산체 붕괴로 생긴 바윗덩이로 이루어지는 집괴암류(集塊岩流)도 있다.

수증기 폭발
지하의 마그마가 뿜어내는 수증기나 지하수 등이 가열되어 생긴 수증기가 주위의 암석을 폭파하는 현상이다. 마그마를 분출하는 보통의 분화와는 달리 산체를 파괴한다. 그리고 화산에는 거의 산꼭대기 부분에서만 분화하는 것도 있고, 흔히 산허리에서 분화하는 것도 있다. 또 대부분의 분화는 거의 원형의 분화구에서 일어나는데, 산체의 약한 부분을 따라 생긴 화구 또는 일련의 갈라진 틈에서 분화하는 화산도 있다.

분화 규모
화산폭발의 대소는, 우선 분연의 높이나 양 등으로 대강 알 수 있다. 안산암 등 점성이 강한 용암을 분출하는 폭발에서는 분연의 높이가 1만m 이상 되는 일도 적지 않은데, 목격된 최고높이는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화산 폭발 때의 약 8만m이다. 또 분출된 화산쇄설물의 분포·양 등과 지진계에 기록된 폭발의 충격에 의한 지진동의 최대진폭 등으로 강도가 보다 정량적으로 구해진다. 화산쇄설물의 총량이 수십만t 정도의 대폭발은 압력 200∼300atm, 분출물의 초(初) 속도는 100∼200㎧, 기계적 에너지 10∼10erg 정도였다. 그러나 일반적 분화에서는 폭발이 되풀이되고 용암류 등이 분출되는 경우도 많다. 또한 분화의 총에너지에는 분출물에 초속도를 주는 기계적 에너지보다도 훨씬 큰 열에너지를 비롯하여 화산성 지진, 미동(微動) 등에 의한 진동 에너지, 화산분출물이 지표까지 상승하는 위치 에너지 등 다른 여러 가지 에너지까지도 합산해야 하므로 그 산출은 복잡하다. 그래서 편의적으로 분화의 규모를 나타내는 데 고형의 화산분출물(유출용암, 화산쇄설물 등)의 총량이 흔히 쓰인다.

화산의 형태
화산은 형태도 다양하지만 용암의 종류나 분화의 형식과 깊은 관계가 있다.

폭렬화구(爆裂火口)
단기간에 소수의 폭발만으로 활동을 그치고, 화구만이 대략 원형으로 움푹 패어 있는 것으로 여기에 물이 고인 것을 마르(maar)라 한다. 남부 독일의 아이펠지방에는 폭렬화구가 125개나 있다.

분석구(噴石丘)·구상화산(臼狀火山)
분석구는 화산쇄설물만으로 구성된 원뿔모양의 작은 언덕이다. 높이에 비해 화구가 큰 분석구를 구상화산(호마테)이라 한다. 하와이 다이아몬드헤드화산이 전형적인 예이다.

성층화산·원추화산
성층화산은 용암류와 화산쇄설물이 쌓여 생긴 화산으로, 안산암이나 현무암 화산에 많다. 그 중 극히 단순한 형태가 원추화산(코니데)으로, 산꼭대기에 가까울수록 급경사를 이루어 그 각도가 40°에 달하는 수도 있다. 일본에는 원추화산이 많다.

순상화산
현무암 등의 유동성이 많은 용암이 얇고 넓게 흘러나와 서양의 방패를 엎어 놓은 것같이 극히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화산으로, 하와이의 마우나로아화산이 전형이다.

용암대지
유동성이 많은 현무암질 용암이 대량으로 흘러나와 생긴 광대한 대지(臺地)를 말한다. 중생대 백악기에 생긴 인도 데칸고원(면적 50만㎢, 두께 2㎞)을 비롯하여 여러 지질시대에 생긴 용암대지는 지구표면의 약 200만㎢를 차지하는데, 생성이 목격된 것은 1783년 아이슬란드 라키화산의 분화 때 뿐이다.

종상화산·용암탑
유문암·석영안산암·안산암의 점성이 강한 용암이 지표로 밀려나와 생긴 화산이다. 종상화산은 톨로이데, 용암탑은 벨로니테라고도 한다.

칼데라
지름 2㎞ 이상의 화구 모양으로 움푹 패인 와지를 말한다. 화산폭발로 산체가 파괴되거나, 화구가 벽의 침식·붕괴로 확대되어 생긴 것도 있지만, 세계의 주요 칼데라는 화산쇄설류 등으로 다량의 마그마가 한꺼번에 분출한 직후에 화구 부근의 땅이 함몰하여 생긴 것으로 생각된다.

복합화산·복식화산
복합화산은 복수의 화산체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며, 실재하는 화산의 대부분이 이것이다. 복합화산 가운데 주로 성층화산이 몇 개 관입된 식으로 겹쳐 있는 것을 복식화산(또는 복성화산)이고, 바깥쪽의 산을 외륜산(外輪山), 안쪽의 산을 중앙화구구(中央火口丘)라 한다.

화산의 분포와 화산대


세계의 화산대
지구상의 화산은 전체적으로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다. 어떤 한정된 지질시대에 분출한 화산이 많이 늘어서 있는 지대를 화산대(火山帶)라 한다. 신생대 제3기에서 제4기(과거 약 500만 년 동안)에 걸쳐 생긴 화산 중, 주로 육상의 조사로 확인된 것이 약 4000개가 있으며, 젊은 습곡산맥, 특히 호상열도나 대륙 연변, 대륙내의 단열대(斷裂帶)나 대양내의 중앙해령(中央海嶺) 등에 밀집해 있다. 안데스산맥, 일본 열도 등으로 이루어져, 전세계 활화산의 60% 정도를 포함하는 환태평양 화산대를 비롯하여, 알프스 주연(周緣)에서 카프카스, 미얀마를 거쳐 인도네시아에 이르는 지중해화산대, 아프리카 동부의 대지구대(大地溝帶)에서 홍해(紅海)를 거쳐 아라비아반도에 이르는 동아프리카 화산대 등이 두드러진다. 이들 화산대는 조산대(造山帶)와 거의 일치하며, 현재도 지각변동이 활발하다. 중앙해령 화산대가 해면상에 나타나 있는 아이슬란드나 그 북방의 얀마옌섬에도 활화산이 많다. 또 하와이나 갈라파고스제도처럼 고립된 화산지역도 있다. 세계의 화산분포는 지진의 분포와 90℃ 이상의 온천이나 지열(地熱)지대의 분포와도 대략 일치한다. 화산활동이나 지진·지각열류(地殼熱流)·지각변동은 모두 지구 내부의 맨틀의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태평양 화산대는 성층화산이 많으며, 광대한 화산쇄설류 대지와 칼데라가 발달해 있고, 분화는 대체로 폭발형이다. 암석은 현무암·안산암·석영안산암·유문암으로 이루어지며, 특히 칼크-알칼리암계의 안산암이 특징적인데, 화산대의 내호측(대륙측)일수록 알칼리(NaO+KO)가 많으며, 전형적인 알칼리암도 산출된다. 지중해 화산대인 인도네시아나 에게해역은 환태평양과 마찬가지의 호상열도이며 안산암질의 활화산이 많고 분화는 폭발형이며, 알프스 주연에는 알칼리암계의 화산이 있으나, 활화산은 남부 이탈리아에 한정된다. 맨틀대류 상승부로 지목되는 동아프리카 화산대는 대체로 극히 산화칼륨(KO)이 많은 알칼리암으로 이루어지는데, 특수한 탄산염 용암 카보나타이트와 알칼리와 적은 현무암 솔레아이트도 분출한다.

해저화산과 화산섬
해저분화 분출물의 퇴적이나 해저의 융기 등으로 화산섬이 생기는 수가 있다. 전세계에서 유사 이후에 해저분화가 확인된 화산 약 200개 가운데, 1/4 정도가 새 섬을 탄생시켰는데, 파랑(波浪)의 침식 등으로 대부분 모습이 사라졌다. 수심 수백m까지의 얕은 해저의 분화는 수면의 분등(噴騰), 죽은 물고기나 부석의 부상(浮上), 해수의 오탁·변색, 온도상승, 해면 위로의 분연, 분석(噴石) 등에 의해 확인된다. 지구 표면의 약 2/3를 차지하는 해양역의 화산에 관한 지식은 전반적으로 아직 빈약하지만, 1968년부터 미국을 선두로 국제적 심해굴착계획 등으로 급속도로 진전되고 있다. 해양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얇은 퇴적물 밑에 두께 수㎞의 현무암질층이 있으며, 또 총연장 약 8만㎞인 중앙해령은 지구상에서 가장 큰 화산대라고 할 수 있다. 해양저의 현무암은 일반적으로 알칼리가 적은 솔레아이트로 산화칼륨이 적은데, 대서양 중앙해령의 정상부분에는 알칼리 현무암의 분화가 진행된 것도 있다. 해양저에 펼쳐진 현무암은 중앙해령에서 떨어진 곳일수록 생성연대가 오래되었음이 밝혀져, <판구조론> <해저확장설>의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 또 해산이나 화산섬의 분출물은 대체로 중앙해령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알칼리가 많아진다.

화산의 이용과 방재
화산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풍광과 풍부한 온천을 낳으며, 석재(石材)나 붕산(硼酸) 등을 생성한다. 온천은 주로 지하수가 마그마나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수증기 등으로 가열되고, 또 이 물질들을 응용하여 지표로 분출한 것으로서, 젊은 활화산보다도 노쇠하거나 사멸하여 침식이 진행된 화산지역에 많다. 근년에 온천, 분기의 열에너지의 다각적 이용이 진전되어, 1985년 분기에 의한 지열발전이 미국 144만㎾, 필리핀 78만㎾, 이탈리아 46만㎾, 멕시코 43만㎾, 일본 21.5만㎾에 이르고 있다. 화산 재해에는 토목공사나 농경의 곤란, 강산성(强酸性)의 독수(毒水)의 해, 황화(黃化) 변질시대의 산사태 등도 있지만, 분화의 해가 특히 현저하다. 용암류·화산쇄설물·화산기체·폭풍 등을 비롯하여 분화의 전후에 일어나는 화산성 진동, 산사태, 지각의 균열, 해저분화 등에 따르는 해일 등으로 재해가 발생하는데, 화산쇄설류·화산이류는 특히 위험하다. 화산의 방재를 위해서는 화산활동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그 동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관측체제를 확립함과 동시에, 갖가지 방재공사와 경보조직을 정비하고, 화산 지식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산활동의 실태를 구명하고 그 동정을 감시하기 위해 세계의 주요 활화산에서는 상시 관측이 실시되고 있다.

 

한국의 화산
한국의 화산지형은 국한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화산지형에서 보기드문 유형을 비교적 고루 갖추고 있다. 즉, 백두산의 산체를 이루는 순상화산, 정상부의 종상화산, 칼데라호 천지, 개마고원·신계곡산·철원평강 등의 용암대지, 울릉도의 칼데라분지인 나리분지와 중앙화구구가 이중화산을 이루는 성인봉, 한라산의 화구호 백록담, 한라산 기슭의 기생화산 등이 있으며, 특히 제주도의 성산 일출봉의 산체 구상화산과 화구·화구원(火口原), 화산쇄설물로 이루어진 분석구 등은 그 좋은 예이다.

현재 한국은 중국·시베리아와 같이 안정지괴의 일부를 이루어 화산지형의 분포는 적다. 그러나 지질지대에는 격렬한 화산활동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형성 시기는 제3기 말에서 제4기 초로 분포지역과 형태는 다음과 같다.

백두산(白頭山)과 개마용암대지
백두산(2744m)은 전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순상화산이나, 2200m 이상의 산정부는 알칼리성 조면암으로 구성된 종상화산으로 형성된 아스피테-톨로이데식의 복합화산이다. 산정부에는 함몰로 생긴 칼데라호 천지(天池)가 있고, 천지의 물은 달문(闥門)이라는 화구벽을 통해 쑹화강[松花江(송화강)]으로 유입된다.

개마용암대지
홍적세에 백두화산대의 열하를 따라 유동성이 강한 현무암이 분출하여 형성된 백두용암대지라고도 한다.

중부지방의 용암대지
철원·평강용암대지와 신계·곡선용암대지로 구분된다. 앞의 것은 제4기에 유동성이 강한 현무암의 열하 분출로 이루어진 용암대지로, 화강암지역의 접촉선을 흐르는 한탄강(漢灘江)은 한국에서 보기드문 유년곡(幼年谷)을 형성했다. 뒤의 것은 홍적세 열하 분출로 이루어진 용암대지로 예성강(禮成江)과 대동강(大同江)의 지류 남강(南江)이 발원이다.

제주도와 한라산(漢拏山, 1950m)
제3기 플라이오세에 조면암이 해저에서 분출하여 종상화산을 이루었고, 제4기 홍적세에 현무암이 분출하여 순상화산을 이룬 것이다. 산정부에는 화구호 백록담(白鹿潭)이 있다. 기슭에는 360여 개의 기생화산(寄生火山)이 있는데 이는 용암이 폭발성 주상절리(柱狀節理)를 따라 발달한 해안폭포와 만장(萬丈)·김녕(金寧)·협재(挾才) 등지에 발달한 용암굴이 있다.

울릉도
최고봉 성인봉(聖人峰, 984m)은 제3기 말에 점성이 강한 조면암과 안산암으로 이루어진 종상화산이다. 중앙북부에는 칼데라분지인 나리분지(羅里盆地)가 있고 분지 중앙에는 화구구 알봉(611m)이 있어 이중화산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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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화산폭발 -  위험한 섬나라 일본화산폭발

화교 - 국적문제의 역사 논란의 중심 화교

화교 - 국적문제의 역사 논란의 중심 화교

 

 

 

화교 (華僑)

해외 거주 중국인. .
설명
해외 거주 중국인. 중국국적을 지닌 채 해외 여러 곳에 정착하여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적·사회적·법률적·정치적 등의 유기적 연관을 유지하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말한다. 여기에서의 중국인이란 중국적 문화나 경제활동 등에서 연관 있는 타이완[臺灣(대만)]과 중국 국적의 한민족계(漢民族系)를 가리킨다. 이들은 주이주지인 동남아시아 및 남아메리카대륙의 각국 국적법이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채택하고 있는데도 혈통주의에 의해 취득한 중국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이중국적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화예(華裔)·룩친(Lukchins)같이 중국인을 조상으로 하더라도 현지 국적을 취득하고 혼혈 동화하여 지연·혈연 의식이 약해지고, 혼혈은 하지 않았어도 바바차이니스 같이 현지인화된 사람이 많아 해외로 이주한 중국인이라는 상식적 해석만으로는 현재의 화교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화교사회 역사
화교발생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9∼13세기 당(唐)나라 말기에서 송(宋)나라에 걸친 북방민족 침입으로 화난[華南(화남)] 방면으로 이동해 간 한민족의 해외유출이 그 초기적 존재이다. 이들은 송·원(元)시대 해외무역 발전과 원나라에서 명(明)나라 중기에 걸친 아시아원정으로 남방으로의 이주가 촉진되었으며, 16세기 명나라 말기 이후 제한적이었던 관허무역이 민간에게 개방되어 남양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동남아 일대로 이주가 확산되었다. 그 뒤 17세기에는 청(淸)나라의 압박으로 인한 명나라 관계자의 남천(南遷) 및 해외도항금지정책으로 인한 생활난과 무역 이윤을 위한 집단적 피난이 일어나 근대 이전 화교사회 형성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19세기에는 식민지개발에 필요한 노동력으로서 쿨리[苦力(고력)]무역에 의한 해외이주가 이루어졌다. 이는 청나라의 정치적 부패와 그에 따른 경제적 피폐,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강국의 동양진출, 아편전쟁을 전후한 열강의 중국침략 등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서유럽 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로 발전하기 위하여 식민지 분할과 독점 및 개발을 전개하였는데, 그때까지 식민지 밖에서 도입되는 노동자는 주로 아프리카대륙의 흑인노예였다. 그러나 아프리카대륙 식민지화와 노예해방령 실시로 값싼 노동력이 없어지기 시작하여 흑인노예의 대체노동력 수요가 발생하여, 영국의 식민지지배로 생겨난 남인도 유랑농민과 아편전쟁 등으로 형성된 중국의 유랑농민으로 충당되었다. 이들은 남아프리카·서인도제도(특히 쿠바)·미국·캐나다·페루·영국령 기아나(현재의 가이아나)·파나마·오스트레일리아·하와이·동남아시아 등에서 사탕수수밭 등의 농원(農園), 정글 개발, 금·주석 광산 채굴, 철도 부설 노동자로 사용되었다. 그 뒤 쿨리의 일부가 소상인(小商人)이 되어 식민자와 피식민자의 중간적 존재로 식민지 지배체제 속으로 흡수되면서 오늘날의 화교사회가 형성되었다.

 

화교사회의 고민과 모순
1909년 이후 중국은 혈통주의에 입각한 국적법을 제정하여 화교를 국적을 잃지 않은 사람으로 규정하고 그 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후 화교 거주국들이 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시작하고, 중국은 국공내전(國共內戰)을 거쳐 사회주의 중국이 되어 거주국과 중국과의 정치·경제체제와 양자를 둘러싼 국제관계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 당시 이중국적으로 생활하던 화교는 내외로부터 중간자적 생활방식에서 벗어날 것을 강력하게 강요받게 되었다. 또 변해버린 중국은 그 이데올로기나 정치체제로 보아 화교의 후예들이 정치적·법률적 귀속감을 지닐 수 없는 나라가 되어 미·소 냉전체제, 격화하는 동서대립, 미국의 중국봉쇄정책으로 이어지는 1970년대 초까지 그들은 스스로의 처신을 결정하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거주지 대부분이 독립국이 되었을 무렵 자신들의 실존과 관계되는 정치적·법률적 귀속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화교들은 거주국의 시민권·국적을 선택하여 스스로 화교에서 화인(華人)이 되었다. 즉 자기들은 임시로 살고 있는 떠돌이적 존재는 아니며, 중국국적을 가진 채 남의 나라에 벌이를 나온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화인이 거주하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타이를 제외하면 구미열강의 식민지지배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되는 신흥국가여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정치면에서는 민주주의가 미숙하고, 나라에 따라 군사정권·독재정권이 계속되고 있었고 경제면에서는 식민지적 경제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국민경제 성숙도가 낮았다. 사회면에서는 통일언어 미확립과 문맹의 보편적 존재, 다원적인 인종·민족의 병존, 여러 가지 종교와 문화에 의한 다양한 가치가 저마다 방치되어 있었다. 더욱이 피식민자 대중은 식민주의 아래에서 굳어진 백인이 모든 면에서 우수하다는 유럽과 미국에 대한 열등감을 계속 지니고 있었다. 그 반동으로서 정치지도자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특권계급에서는 계층간의 모순보다 인종·민족·종교상의 대립을 문제시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은 기본적 모순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인종주의에 사로잡혀 광신적인 국수민족주의에 빠져 배타적 폭력행위까지도 영웅적 행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러한 화교로부터 화인으로의 자기탈피 과정은 인도네시아의 9·30사건, 말레이시아의 5·13사건, 베트남의 보트피플사건 등 엄청난 유혈을 대가로 치렀으나 아직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화교사회의 문제와 전망
오늘날 화인사회나 화교라 불리는 사람들이 놓인 상황은 각 거주국에 따라 다르며, 주체적 의식도 각각 달리하고 있다. 거주력(居住曆)이 여러 세대에 이르는 화예나, 거주지에서 태어나 화어(중국어)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 의식이 희박하거나 없는 경우가 많고, 화교로서 거주국 국적을 취득한 화인은 정치적·법률적 귀속을 중국이 아닌 거주국에서 찾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문화적·사회적 귀속을 뿌리와 관련지어 중화문명에서 찾으려는 객가(客家) 같은 사람들이 있다. 객가는 중국 방언의 하나인 객가어(客家語)를 쓰는 한민족의 한 갈래로 조상은 황허[黃河(황하)]유역의 중위안[中原(중원)]에 살고 있었다. 거듭되는 전란으로 자손들이 광둥[廣東(광동)]·쓰촨[四川(사천)]·푸젠[福建(복건)]·하서(河西)·타이완 등으로 이주하였고, 동남아시아·아메리카대륙·하와이 등지로 벌이를 나갔다가 화교화하였다. 쑨원[孫文(손문)]·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싱가포르 전 총리 리콴유[李光耀(이광요)] 등이 객가 출신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타이·필리핀·인도네시아·베트남에서는 특이한 양상을 띠고 있다. 타이의 경우 과거 여러 세기에 걸친 혼혈과 화인의 정치적 참여에 관용을 보여 화인을 구별하기 어려워졌으며 필리핀의 경우도 혼혈이 꽤 진전되었다.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은 옛 식민지시대부터 이중국적문제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들의 구별을 정확하게 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동남아시아 정치지도자들은 화교를 국민통합의 이분자(異分子), 유통경제를 좌우하는 악덕상인으로서 민족경제·국민경제 형성의 주요한 저해자, 중화사상 체현자(體現者)로서 끝없이 중국에 충성을 다하려는 이중인격자 집단 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적 소수파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인권확립을 추구하는 소극적 행동조차 받아들여지지 않아 현지인과 화교의 심리적 거리를 더한층 멀어지게 하여 정치가·변호사·의사·교사·언론 분야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있는 화인사회 내부에 화인의 진정한 자립을 위한 자조노력이 요구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화교정책
중국 공산당이 본토의 정권을 잡은 뒤 1949∼1965년 제1단계에서는 화교들의 자본과 상공업 기술을 중화인민공화국내로 투자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이바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화교 대부분이 미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국가에 거주하여 이질적 체제인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을 기피해 이에 동조하는 화교가 적었고 오히려 대만으로 옮긴 국민당정권을 지지하였다. 그 뒤 1977년까지의 제2단계에서는 문화대혁명으로 귀국화교는 사회주의 건설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비판을 받게 되어 화교의 유입이 거의 중단되었다. 현재까지의 제3단계에서는 문화대혁명 기간의 화교차별정책을 시정하며 제1단계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이는 중국 공산당내에 큰 변혁이 일어난 데 그 원인이 있다. 즉 1977년 제3차 당중앙위원회총회에서 실권파인 덩샤오핑이 복권되고 1981년 덩샤오핑체제가 확립되어 4개의 현대화정책에 따라 화교자본과의 합작사업을 장려하며 광둥·푸젠 등지에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등 화교자본 유치에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화교정책의 핵심은 화교들을 반제국·반식민지운동이나 소련·베트남에 대한 반패권통일전선의 주요 역량으로 삼는 것이므로, 이를 위하여 국무원에 교무판공실(僑務辨公室) 및 국교화교연합회·화교투자공사 등을 설치하였다. 교육면에서는 화교를 위하여 화교대학·샤먼[廈門(하문)]대학·화교보습(華僑補習)학교 등을 마련하여 화교의 순화에 힘쓰고 있다.

 

타이완의 화교정책
공산당정권이 해외화교들에 대한 제1차정책을 확립하고 그들의 재력을 끌어들여 통일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자, 이를 저지하고 화교들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정책이 추진되었다. 즉 화교증조복무실(華僑證照服務室)을 설치하여 화교들의 귀국·관광·시찰·방문 등의 출입국 절차를 간소화하였고, <화교투자장려조례>를 수정하여 화교자본의 본국 유치와 함께 화교기업인 초청, 화교종업원에 대한 직업교육 등을 강화하고 있다. 한편 해외화교에 대한 교육사업 지원을 위하여 해외화교학교에 대한 지원과 중국어 교육에 대한 지도, 교재 편찬·보급에 힘쓰며, 현지에서의 어문(語文)·요리·서예·회화·민속무용 등의 학습반 개설과 본국유학을 권장하여 고유문화 보급에 힘쓰고 있다.

오늘날의 화교
오늘날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화교는 약 6000만 명에 이르며, 중국본토 12억 인구와 같은 언어·문화·정서를 공유하는 차이니스커넥션으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경제집단으로 조직화되었다. 타이베이[臺北(대북)]·홍콩·방콕·콸라룸푸르·싱가포르·시드니·밴쿠버·샌프란시스코·상파울루 등 각 도시거점들을 연결하는 그들의 도시권 비즈니스망은 일본 상사(商社)나 미국 다국적기업의 영업능력을 압도한다. 또한 자금동원능력도 막대하여 타이에서는 인구의 10%인 화교가 80% 넘는 자본을 보유하고, 인도네시아에서는 인구의 3%를 차지하는 중국계가 경제력의 75%를 장악하고 있으며, 필리핀은 14%인 중국계가 경제의 60%를 쥐고 있다. 경제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국가의 정치권력도 대부분 중국계 화교에 넘어갔다. 아시아의 정치·경제권을 주도하는 이들의 목표는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EU)과 대등한 경제권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개혁과 개방정책에 따라 가장 먼저 발전한 중국 광둥성과 홍콩이 주축이 되어, 홍콩 기업가들이 광둥성에 투자를 집중하면서 사무실은 홍콩에 두고 공장은 중국에서 가동시키는 형태로 상호보완협력체제가 이루어졌다. 여기에 홍콩과 타이베이를 기본점으로 하는 광둥성과 푸젠성을 연결하는 화남경제권이 형성되었다. 그 뒤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에 이어 필리핀·인도네시아까지 가세하여 동남아 상권이 중국과 연결되면서 동남아시아 화교 경제권으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정치적으로는 불가능한 환태평양 경제권이 같은 민족·언어의 화교들에 의해 하나로 연결되어 21세기는 중국인의 세기라는 관측이 일고 있다.

한국 화교사회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한국에 파견된 광둥성 수사제독(水師提督) 우창칭[吳長慶(오장경)]의 군대를 따라 상인 40여 명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 화교의 시초이다. 청(淸)나라는 그 해 통상조약 상민수륙무역장정(商民水陸貿易章程)을 강요하여 화교유입의 길을 터놓았다. 그 뒤 1884년 인천(仁川), 1887년 부산(釜山), 1889년 원산(元山)에 화상조계지(華商祖界地)가 설치되고 화교수가 급증하였는데, 이들의 90% 정도가 산둥성 출신인 점이 한국 화교의 특징이다. 이는 1898년 의화단(義和團)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둥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피란지로서 가까운 한국을 택하였기 때문이다. 1985년 법무부와 중국대사관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총 2만 4742명인데, 1973년 이후 대만의 경제성장에 따라 그곳으로 이주하는 화교수가 늘어나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화교 - 국적문제의 역사 논란의 중심 화교